[러시아는 지금] 외교 현장의 오역, 이해 혹은 오해

입력 2016-09-0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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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러시아 대사·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2009년 봄의 일이다.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났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서 종래 나빴던 미러 관계를 개선하고자 ‘리셋(reset·다시 시작)’ 정책을 추진하던 때다.

클린턴 장관은 회담이 시작되자 기자들 앞에서 라브로프 장관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미국이 새로 추진하는 정책의 취지가 담긴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 라브로프 장관이 상자를 열어 보니 가운데 붉은색 버튼이 있는 초인종 형 물건이 들어 있었다. 아래에 영어로 ‘reset(리셋)’, 위에는 리셋의 노어 번역으로 ‘Peregruzka(페레그루즈카)’라고 각각 쓰여 있었다.

클린턴 장관은 “올바른 노어 단어를 찾느라 애를 썼는데 맞느냐?”고 물었다. 라브로프는 “잘못 찾았다”면서 “페레그루즈카는 리셋이 아니라 ‘과부하’ 내지 ‘과잉대응’을 뜻하는 것이니 ‘perezagruzka(페레자그루즈카)’로 써야 맞다”고 답했다.

오역이 드러난 셈인데, 클린턴 장관은 어색한 상황을 의식했는지 “당신이 우리에게 페레그루즈카(과잉대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조크를 던지고, “우리는 원래 뜻대로 리셋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라브로프는 “우리는 리셋의 정확한 스펠링에 합의를 보았으며 이제 우리 사이에 이견은 없다”고 분위기를 맞추었다.

클린턴 장관은 “라브로프 장관이 우리가 택한 용어를 고쳐 주었으나 사실 우리의 용어도 맞다. 리셋에 열중하니 나와 라브로프 장관의 업무에 과부하가 걸려 있지 않으냐”고 눙쳤다. 그러고는 두 장관은 함께 버튼을 누르는 포즈를 취했다.

이 오역 에피소드는 현장에서는 이 정도로 넘어갔으나 다음 날 언론에는 버튼 누르는 사진과 함께 다소 시니컬한 보도가 나왔다. 러시아의 한 언론은 ‘두 장관이 잘못된 버튼을 눌렀다’는 제목을 뽑았다.

이것이 리셋 정책에 대한 불길한 조짐이었을까? 이후 미러 관계는 리셋이 무색하리 만큼 악화되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상호 제재로 지금 미러 관계는 탈(脫)냉전 이래 최저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최근 미국 대선에서 다시 들춰졌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진영이 이 일을 끄집어내어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에 범한 외교 실책 사례로 홍보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옛소련 공산당 총리를 지낸 니키타 흐루쇼프의 발언에 관한 것인데, 노어 오역에 관한 한 그가 가장 극적인 피해자일 것이다. 그는 1956년 11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폴란드 공산지도자 브와디스와프 고물카를 환영하는 리셉션 연설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과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소멸되고 공산주의 체제가 승리할 것이라는 의미로 “므이 바스 파하로넴(우리가 당신들을 묻어줄 것이다)”이라 하였다.

흐루쇼프 발언의 정확한 의미는 “우리가 더 오래 살아남아 당신들 장례도 보게 된다”는 것이다. 흐루쇼프는 공산주의의 이상에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흐루쇼프는 “부르주아는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자를 양산해낸다”는 칼 마르크스의 주장을 진정으로 믿었다고 한다. 당시 소련이 고도 성장을 하였고 최초로 우주선을 발사하는 등 과학 기술 분야에서 보인 성취도 대단하였으므로 자신감에 차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을 영어로 직역하면 “We will bury you(매장하겠다)”가 된다. 리셉션 현장에 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대사들은 항의 표시로 퇴장하였다. 다음 날 서방 언론들은 흐루쇼프의 언급이 무지막지한 협박이라는 식으로 보도하였다.

흐루쇼프는 적나라한 비유나 촌철살인식 표현을 즐겨하는 성향이 있었다. 언어 습관이 그렇고 또 노어로 들으면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는 서방의 오해나 오역에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표현을 계속 사용하였다.

한 번은 몇 년이 지난 후 미국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또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자 미국 언론들은 흐루쇼프가 핵과 미사일로 미국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한 것처럼 보도하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소련의 미사일 능력이 미국보다 크게 앞선다는 주장이 세를 얻고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에야 이 주장이 사실과 다르며 실은 그 반대였음이 드러났으나 그때에는 그러한 주장이 먹혔다.

급기야 오역된 그의 말은 미국 대선에서도 활용되었다. 1964년 린든 존슨과 배리 골드워터의 대결에서 존슨 측은 대(對)소련 강경파인 골드워터가 당선될 경우 그의 정책과 미국을 매장하겠다는 흐루쇼프의 정책이 충돌하여 핵 전쟁의 참화가 올 것이라는 투의 홍보를 하였다. 홍보에 효과가 있어 골드워터는 대패하였다.

이처럼 외교에서 오역과 통역 오류는 예기치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상대적으로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심하고 빈번하다. 그 이유로는 노어가 여타 언어와 멀고 어렵다는 점과, 러시아와 서방이 불신관계에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선 언어가 특이하므로 오역의 소지가 크다. 위에 든 첫 사례가 여기 해당한다. 또 이와 관련된 다른 문제가 있다. 노어가 상대적으로 영어나 불어 등 유럽 언어와 가깝고 어원을 공유하는 부분도 상당하지만 동일한 뿌리의 단어라 하더라도 노어에서는 뜻이 다른 경우가 많아, 직역을 하면 오역이 된다는 점이다. 마치 한국, 중국, 일본에서 사용되는 동일한 한문 단어가 나라마다 다른 의미를 갖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보다 중요한 요인은 상호 의구심과 대립 의식이다. 이것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쉽게 오해를 하고 편견에 사로잡힌다. 위에 든 두 번째 사례가 여기 해당한다.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도 유사한 문제가 있다. 물론 문제의 정도가 미러 관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국어와 노어는 서로 더 멀고 냉전의 잔재로 불신은 남아 있다. 그래서 오역과 오해로 일이 어긋날 소지가 언제나 있다.

한러 경제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근래 만난 우리 기업인은 러시아와의 사업은 상당 부분 통역의 수준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실토하였다.

이 점에서 한러 관계는 한중 관계와 대비된다. 한중 간에는 두 나라 말을 모두 잘하는 조선족이 있어 상당한 역할을 하나, 러시아의 고려인은 대부분 노어만을 구사하므로 사정이 사뭇 다르다.

그러므로 한러 간 바른 소통을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노어 역량에 더 의존해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근래 젊은 세대들이 노어에 좋은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과거보다는 우려를 덜게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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