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키워드] 박유천과 화장실-화면과 지면에서 냄새가 심해진다!

입력 2016-06-2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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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언론인· 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서머세트 몸(1874~1965)은 많은 작품으로 전 세계에 독자를 확보한 영국 소설가였다. 영국이 점잖은 신사의 나라여서였나, 그는 대표작 ‘달과 6펜스’에 점잖음을 존중하는 문장을 남겼다. 좀 길지만 옮겨보면, “이들 고상한 보헤미안들의 세계에 정절 같은 것을 대단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에 만연해 보이는 천박한 난잡성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점잖은 침묵의 휘장으로 우리들의 기행을 가리는 것을 위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노골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19세기 말 영국의 예술인(보헤미안)들도 자유롭고 기이한 성생활을 했지만 그 경험을 과장스레 떠벌리지 않았으며, 이야기를 하게 될 땐 알 듯 말 듯 절제하며 완곡하게 표현했고, 어땠냐는 질문에는 말 대신 점잖은 미소로 대답했다는 거다. 인간의 본성인 관음증과 노출증을 내놓고 보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며칠 동안 ‘성폭행’과 ‘화장실’ 두 단어가 신문과 방송, SNS에서 빠지지 않았다. 가수 겸 배우인 박유천이 유흥업소와 자기 집 화장실에 여자들을 가둬놓고 성폭행했다는 사건을 소재로 한 보도와 방담이었다. SNS는 그렇다 하더라도 제도권 언론에서는 당연 종편이 더 심했다(‘당연’이라고 한 것은 종편은 이런 사건이 벌어지기만 하면 온갖 전문가들을 불러놓고 이야기를 몇 번씩 시키는 게 의무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한 지 오래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 패널이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편안하다”거나, “샴쌍둥이가 화장실을 사용할 때의 불편함을 보면서 애잔함을 느꼈다” 등 여러 해 전 박유천의 화장실 관련 발언을 삽화와 함께 소개하면서 그가 유달리 화장실에 ‘집착’한 것은 “화장실과 관련한 어릴 때의 어떤 기억 때문일 것 같다”고 분석하자 다른 패널(문화평론가라는 직함이 붙어 있는!)이 튀어나와 “연예인들은 화장실에 많은 돈을 들이는데,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는 사람도 있다”는 수준 높은(?) 진단을 내놓았다. ‘항문기(肛門期)’라는 단어도 나와 찾아봤더니 ‘항문이 성적 쾌감을 주는 원천이 되는 시기라는 정신분석이론 용어’라는 설명이 있었다.

패널들이 최대한 조심하고 있다는 표정과 몸짓, 그리고 ‘고급진’ 용어로 의견을 방출하는 사이에 20년 전, 아직은 많이 젊었던 1994년에 개봉된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엉덩이가 예쁜 여자’로 광고된 정선경이라는 예쁜 배우가 화장실에서 당하다 마지막에는 즐기는 장면을 떠올리는 나를 보았다. 자극적이고 숨찬 장면들이 20년 동안 숨어 있던 무의식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다가 방담에 나온 패널들도 나와 비슷하게 연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유천의 성적 취향’ ‘증거물로 제출된 여성의 팬티’ ‘DNA 분석’ ‘물증은 없는데 혐의 입증 어떻게?’ ‘2차(성매매)를 간다는 유흥업소 종업원이 유흥업소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게 말이 되나’ 등등, 화면 아래로 흘러가는 자막 속의 문구들과 이런 것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지식과 정보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탈탈 털어놓을 때 남녀 패널들의 눈빛과 입모양이 달라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그런 생각을 들게 했다. 저들은 무슨 경험을 떠올렸을까? 영화일까? 실제 경험일까? 저들은 자신이 원해서 저런 말들을 늘어놓나, 아니면 강요-어떤 형식이든-에 따른 것일까를 생각했다.

박유천의 성폭행 사건에 대한 심층분석 방담이 끝나자 패널들은 서울 강남에서 60대 여인을 살해한 한 남자가 성폭행 방지를 위한 전자발찌를 끊고 달아난 사건을 소재로 다시 자신들의 지식과 정보와 진단과 예방방지책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건 다 보지 않았다. 주인공이 박유천처럼 유명인사도 아니고, 비슷한 사건이 많아서였겠지.

관음증과 노출증은 경험이 쌓일수록 강도가 높아진다. 거기에다 상업주의가 끼어들면 그 흐름을 막기는 더 힘들게 된다. 종편이 처음부터 헐떡였겠나. 신문이 처음부터 야릇한 사진과 글들을 실었겠나. 한 번 벗기고 두 번 벗기다 보면 ‘다 벗겨라’라는 안팎의 주문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 박유천 성폭행 사건에서 화장실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 건 이런 보도 태도가 쌓이고 쌓인 결과이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의 결론은 “한국 언론들, 다 벗기지 마라. 화면과 지면에 일부러 화장실 냄새를 처바르지 마라. 안 그래도 냄새 많은 사회이다”이다.

인도 출신 영국 소설가 살만 루시디(1947~ )의 소설 몇 줄을 옮기겠다. 내 결론을 보완하기 위해서. 1981년 작 ‘한밤의 아이들’에 나오는 문장이다. “피아는 립스틱을 바른 도톰한 입술을 아낌없이 던져 사과 한 알에 육감적인 키스를 했다. 그러고 나서 사과를 나이야르에게 건네주었고, 나이야르는 그 반대쪽에 힘차고 열정적인 입맞춤을 퍼부었다. 이른바 간접키스라는 관행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요즘 영화의 표현 방식에 비하면 이 얼마나 세련된 발상인가! 숨 가쁜 갈망과 에로티시즘이 느껴지지 않는가? 요즈음은 젊은 남녀 한 쌍이 수풀 속으로 뛰어들고 곧이어 수풀이 우스꽝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하면 일제히 떠들썩한 환호성을 지르는데, 상황을 넌지시 암시하는 재간이 이토록 천박해졌다.” 루시디도 나처럼 몸에게서 영감을 얻었나, ‘절제’가 ‘과잉’보다 전달력이 크다고 말하고 있으니! 과유불급(過猶不及), 과유불급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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