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외할머니의 기다림

입력 2018-11-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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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충남 천안 지나 전의를 거쳐 조치원 가는 길, 불과 한 주일 만에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어느새 대부분의 논은 추수를 끝냈고 나지막한 산등성이마다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했다. 가을의 한복판을 지나자니 불현듯 그리운 이들 모습이 하나둘씩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나의 외할머니는 키가 유난히 작았다. 반면 외할아버지는 당시 기준으론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셨다. 하지만 한량기 농후한 전형적 마마보이셨다. 가끔 엄마와 이모들은 외할머니께서 얼마나 고된 시집살이를 하셨는지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길 풀어놓곤 했는데,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은 스토리가 있다. 외할머니가 이불 호청을 빤 후 빳빳하게 풀 먹여 다듬이질까지 해서 반듯하게 개켜 놓으면 당신 시어머님께서 맘에 안 든다시며 다시 빨래통에 넣으셨다는 게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께선 얼마나 참담하셨을까…

경기고녀(현 경기여고) 출신의 외할머니는 재주가 많은 분이셨다. 특히 애플리케(applique: 바탕천에 좋아하는 무늬의 조각천을 오려서 붙이고 윤곽을 실로 꿰매 붙이는 간단한 서양자수) 솜씨는 ‘민속 예술가’(folk artist)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하셨다. 할머니는 13명이나 되는 손자손녀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마다 손수 만드신, 세상에 하나뿐인 애플리케 신발주머니를 선물해주셨다. 언니 신발주머니엔 어미 소와 새끼 소가 사이좋게 풀 뜯는 모습을, 내 신발주머니엔 어미닭과 병아리들이 평화롭게 노니는 모습을 색색의 조각천을 붙여,담아 주셨던 기억이 난다.

외할머니는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깨인 분이셔서 손자손녀 구분 없이 사랑해주셨고, “여자들도 집에 들어앉아 살림할 생각 말고 사회에 나가 열심히 활동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실제로 할머니는 당신 막내딸이 계속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네 명의 외손주를 싫은 내색 전혀 없이 정성으로 키워주셨다.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손녀딸인 나를 두 손 들어 환영해주신 분도 외할머니셨다. 외할머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날 직접 졸업식장까지 오셔서 금일봉과 함께 ‘손편지’를 주셨다. “이 할머니 진심으로 네 卒業(졸업)을 祝賀(축하)한다. (중략) 壯(장)하다 나의 손녀, 부탁한다. 大學院(대학원)에 가서도 如前(여전)히 變(변)치 않는 努力(노력)으로 유감없는 지능을 발휘하야 大鵬(대붕)의 뜻을 품고 날개를 다듬어 저 희망의 天地(천지)에서 크게 날기를 할머니는 주님께 기도한다. 이 돈은 少額(소액)이지만 할머니의 誠意(성의)이니 그리아러다구.” 정갈한 필체의 외할머니 손편지를 요즘도 가끔 꺼내 읽는다.

외할머니는 딸 셋 아들 둘 다섯 남매를 두셨는데 아들 둘을 6·25 전쟁 통에 모두 잃으셨다. 막내아들은 학도병으로 나가 전사(戰死)했고, 큰아들은 끝내 생사를 모른 채 실종처리되었다 한다. 엄마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한 철없던 남편을 대신해서 그나마 두 아들에게 마음 붙이고 사셨을 텐데, 지금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외할머니의 절절했던 아픔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도 같다.

외할머니는 1988년 겨울에 돌아가셨다.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눈을 감지 못하시는 것 같았는데, 결국은 인류학 박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큰외손녀 얼굴을 보고서야 눈을 감으셨다는 이야길 나중에 전해 들었다. 마지막 순간 외할머니는 “화장하지 말고 매장해 달라”는 유언을 하셨다 한다. 실종된 큰아들이 돌아오면 술 한잔 올릴 엄마 무덤은 있어야 하기에… 수년 전, 외할머니께서 묻히셨던 경기 고양시 일산 공원묘지 부근이 개발되면서 이장(移葬)을 하게 되어 이모들이 나서서 수목장을 해드렸다. 살아생전 내내 “아들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고 말씀하시던 외할머니, 이젠 길고 긴 기다림에서 놓여나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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