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의 키워드] 죽도록 웃기기-우리 모두 ‘트루먼 쇼’ 주인공이다

입력 2017-08-2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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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동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는 이제 어른들의 노래가 됐다.

어쩌다 TV에 나온 사람들치고 ‘맛있어 죽겠고, 멋있어 죽겠고, 웃겨서 죽겠고, 좋아서 죽겠다’는 표정을 짓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이런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나라면 저거보다 더 웃길 수 있었을 텐데, 더 좋은 리액션, 더 좋은 멘트를 쳤을 텐데…’라고 ‘방송용어’를 날리며 그들을 부러워한다.

전·현직 정치인과 변호사, 의사, 교수, 언론인 등 전문직 종사자들도 TV 출연에 ‘환장’한다. 이름을 알리고, 권력을 잡고, 돈을 만질 수 있어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점잖고, 고상한 사람들이 수십 명의 스태프와 방청객이 모인 스튜디오에서 ‘쪽팔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바보로 보이게 하는 언행과 동작으로 시청자를 억지로 웃기려 안간힘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콘텐츠’보다는 ‘예능감’이다. ‘예능감’은 ‘필요할 때 웃겨주는 능력’이다. 프로그램 출연자가 말로건, 표정으로건, 동작으로건 한번 ‘빵’ 터뜨리면 ‘예능감이 있다’고 출연진끼리 추어준다. 상대방 말을 ‘치고 들어가기’, 치고 들어가면서 민망, 머쓱하게 만들면 빵 터질 확률이 높다. 예능감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MSG를 잘 쳐야 한다’는 ‘멘트’도 있다. 음식이 더 맛나게 될 걸 기대하고 뿌리는 인공조미료(MSG)처럼 (인공적인) ‘거짓’이나 ‘과장’을 동원하라는 주문이다.

예능감은 전문성보다 더 대접받는다. 고도의 전문성과 약간의 예능감을 가진 사람보다 고도의 예능감과 약간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훨씬 존중받는다. 시청률을 높이고 광고를 ‘땡겨올’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면 예능감도 전문성이다. 이 시대에 가장 대접받는 전문성이다.

그러나, 예능감도 ‘기획’과 ‘설정’이 없으면 쓸모가 없다. 아무리 웃기고 기발하고 재치 있어도 좋은 기획, 훌륭한 설정(대본)이 없으면 보여줄 기회조차 생기지 않는다. 기획과 설정은 없는 예능감도 ‘있게’ 보여준다. 깔아준 멍석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자빠지는 출연자들을 보고 시청자들은 웃는다. 출연자의 예능감이 아니라 기획과 설정에, PD와 작가의 능력과 재치에 웃어주는 프로그램이 훨씬 많을 것이다.

▲스튜디오를 탈출한 트루먼 버뱅크.
▲스튜디오를 탈출한 트루먼 버뱅크.

TV의 기획력과 설정력을 ‘궁극의 힘’으로 표현한 영화가 ‘트루먼 쇼(1998)’다.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태어나는 순간조차 작가가 설정하고 기획한 삶을 살아왔으며, 자신의 모든 것이 쇼(드라마)로 전 세계에 방영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쇼(기획)에서 탈출한다는 이야기다. 트루먼은 코미디언 짐 캐리가 맡았다.

TV에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트루먼 쇼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이 한 가지 기획과 설정 아래 움직이는 것 같아서다. 이 기획의 기본 ‘콘셉트’는 ‘웃고만 있어라, 근심 걱정 말아라. 우리가 알아서 다 해주마’일 것이다.

이 글 제목 ‘죽도록 웃기기’는 미국 언론학자 닐 포스트먼이 1985년에 써낸 책 제목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따왔다. ‘트루먼 쇼’ 제작에도 영감을 주었다는 이 책에서 그는 ‘바보상자 TV’가 사람들을 어떻게 바보로 만드는가를, 명저(名著)의 필수 요소인, ‘동서고금의 이론과 사례’를 바탕으로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다. ‘미국의 TV는 시청자에게 즐길거리를 쏟아 붓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라는 문장이나 ‘성직자와 대통령, 교육자와 뉴스 진행자들은 자기 분야의 훈련보다는 쇼맨십을 갖추는 데 더 안달이 날 지경이다’ 같은 표현이 수시로 송곳처럼 튀어나온다.

32년이 지난 2017년 대한민국의 TV를 봤으면 그 역시 자신의 책 제목을 이렇게 바꾸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웃겨 주겠다고, 웃다가 죽으라는 기획이 사방에 무성한 것 같으니까! 나도 이 글에서 웃기려고 엄청 노력했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죽도록 즐기기’에는 이런 경고도 있다.

〈TV의 본질은 시각적인 만족을 주기 위해 사고력을 억누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이 모든 결과로 미국인들은 서구사회에서 가장 오락적인 동시에 가장 시야가 좁은 국민에 가깝게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미국인들의 의견은 의견이라기보다는 정서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터이다. 그래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할 때 보면 매주 결과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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