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대한민국 국민의 축제 DNA

입력 2016-12-3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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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오구’는 죽음의 형식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내용은 이렇다. 노모(老母)가 아들에게 극락왕생굿인 산오귀굿을 해 달라고 조른다. 미신이라고 버티던 아들은 노모의 등쌀이 너무 심해 결국 굿판을 벌이고 노모는 신명 나게 굿을 즐기다가 절정의 순간에 숨이 멎는다. 연극 무대는 바로 초상집으로 바뀌고 “아이고” 곡소리가 공연장을 채우는데 가족의 죽음은 분명히 비극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상주도 문상객도 오래간만에 무슨 잔치를 벌인 듯 마시고 먹고 화투판에서 신이 나게 난장질이다. 그 장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죽은 자가 산 자들에게 서로 어우러져 즐겁게 잘 살라고 다리를 놓는 것 같기도 하다. 연극 ‘오구’의 죽음을 소재로 한 해학과 풍자 놀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관인데, 급기야 초상집에 저승사자가 찾아오기까지 한다. 벌거벗은 채 과장된 성기로 관객들을 민망하게 만들면서 말이다. 그리고 화투판에 끼어들고, 과부와 잠자리를 하고, 상속문제에 시시비비를 가리며 사람보다 더 적나라하게 현실적인 모습을 보인다. 결국에는 죽어 있던 노모가 관 속에서 벌떡 일어나 재산 문제를 직접 정리해 해주고는 잘 살라며 극락왕생 길로 춤추며 떠난다.

연극 ‘오구’ 초연 당시 조연출로 참여하면서 늘 인상적인 것이 외국인 관객의 반응이었다. 해외 공연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연극 ‘오구’의 상상력과 파격에 감탄하면 이윤택 작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우리 한국인의 죽음이 원래 이래요”라고 했다.

연극 ‘오구’의 재료는 한국인의 DNA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고통이 엄습하면 역설적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것도 집단적으로 어우러지며 공동운명체임을 강렬하게 확인했다.

민속학자 김열규 선생은 한국인은 특유의 정(情)이 중심 정서가 돼 원한(怨恨)을 신명(神明)으로 바꾸는 집단 치유의 지혜를 터득해 왔다고 했다. 정(情)이 무너지면 원망과 분노가 생기고 그럼 그때 한국인의 집단 정서인 신명이 자연 발동돼 정을 회복하는 것이다.

지난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9차 촛불집회는 예상대로 대규모 크리스마스 축제로 기획됐다. 주최 단체도 기획 프로듀서도 없었다. 시시각각 터지는 충격적인 사실들 앞에서 가족에게 충실하고 일터에서 성실하고 소소한 일상의 명제들에 삶을 걸며 살아온 생활의 질서를 깨지 않으려 애쓰는 국민이 기획자였다. 분노와 자괴감이 클수록 희망의 탈출구를 개척하는 절실성이 더 커야만 버티는 스스로를 위한 이벤트 연출이었다.

2002년 월드컵 때도 스포츠 행사의 집단 응원 행위를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집단 문화 프로그램으로 기획·연출했던 건 국민 스스로였다. 대학 입시를 위해 온 가족이 몇 년간 입시 지옥이라는 늪에 기꺼이 빠지는 국민, 내 집 장만을 위한 은행 이자를 평생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약속으로 섬기는 국민, 세금 밀리는 것도 교통 신호등 위반도 큰 범법 행위인 양 가슴 졸이는 국민, 그렇게 소박하게 선량한 국민의 가슴속에 대대손손 흐르는 신명과 흥이 기발하고 과감하게 표출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국격이 바닥을 치고 집단 배신과 농락에 시달리는 절망의 순간에서 국민은 다시 자발적인 집단 행위로 스스로의 희망을 찾고 있다. 이번에는 대규모 촛불 평화 집회다.

어떤 국민은 내 손으로 그런 인물을 대통령이라고 뽑았기에 속죄하듯 촛불을 들었다 했다. 어떤 국민은 자식들에게 물려줄 미래는 부끄럽지 않도록 어린 자녀와 함께 촛불을 들었다 했다. 어떤 국민은 평생 보수여당밖에 모르고 살아서 죄송하다며 촛불을 들었다. 모든 국민이 사태의 원인을 ‘나’에서부터 찾았다. 그렇게 자연발생적인 집단 신명이 된 촛불집회는 평화롭고 따사로운 축제가 됐다.

그래서 이 와중에도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럽다.

위기 때마다, 조상들이 물려준 해학과 풍자와 희망의 엔터테인먼트 기질을 발휘해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결코 흩어지지 않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대한민국의 주체임을 되새기는 축제 한 판을 벌이는 이 땅의 국민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여전히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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