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공항 직원만 부담 떠안아
국토부, 유연한 정책 결단 바람직

국토교통부가 지난 3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보조배터리 기내 반입 규정의 실효성을 “종합적으로 다시 따져 보겠다”고 밝혔다. 전문성이 턱없이 부족한 실무자의 어설픈 보고보다 현장에서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부작용을 주목하는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의 합리적이고 유연한 결단 덕분이다. 일방적으로 정부 정책의 권위만 앞세우는 경직된 관료주의적 깡통 규제에 신물이 난 국민에게는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한 모습이다.
국토교통부가 국제적 규범으로 정착시키겠다면서 요란하게 내놓은 ‘비닐지퍼백 규정’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얇고 투명한 비닐지퍼백이 보조배터리의 화재 예방·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어리숙한 실무자의 황당한 착각일 뿐이다. 언론에 보도된 방재시험연구원의 간단한 실험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다.
현장의 혼란이 매우 심각하다. 상식을 벗어난 엉터리 반입 규정 때문에 길어진 검색에 분노한 승객들이 검색대에서 나눠준 비닐백을 미련 없이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있다. 쓸모없이 버려지는 비닐백에 의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다. 일주일에 10만 장의 비닐백을 낭비했다는 보도도 있다. 엉뚱한 부담을 떠안은 항공사·공항 직원의 불만도 외면할 수 없다. 어처구니없는 ‘비닐백’ 규정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겠다던 국토부의 기대는 부끄러운 착각이었다.
국제민항기구(ICAO)의 ‘위험물 항공운송 기술지침서’(Doc9284)에 ‘플라스틱 백’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전통적인 건전지와 달리 ‘+극’(양극)과 ‘-극’(음극)이 물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할 수밖에 없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외부 합선’(external short-circuit)에 의한 화재를 예방하는 것이 목적이다. 노출된 단자를 테이프로 막는 방법도 허용된다. 리튬이온 배터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절에 마련된 낡은 규정이다.
사실 ICAO의 규정은 시작부터 사문화(死文化)되고 말았다. 그동안 승객에게 플라스틱 백 규정을 적용하는 항공사·공항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외부 합선 위험이 당초 걱정했던 것처럼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2016년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USB-C 타입의 단자에서는 현실적으로 외부 합선의 가능성이 더욱 줄어들었다. 단자의 틈새에 머리핀이나 클립과 같은 이물질이 쉽게 끼지 않도록 해주는 설계 덕분이다.
투명한 비닐백을 사용하면 승객이 보조배터리의 열폭주에 의한 이상 증상을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일부 전문가의 주장도 비현실적이다. 몸에 지니거나 등받이 주머니에 넣어놓으면 비닐백의 투명성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내열(耐熱) 파우치나 금속 보관함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김해공항의 에어부산 화재는 ‘절연파괴’에 의한 ‘내부합선’으로 발생했다는 것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정밀감식의 결과다. 청라아파트의 전기자동차 화재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분리막 파손’에 의한 ‘열폭주’와 마찬가지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국과수가 걱정하는 배터리의 ‘내부 합선’을 국토부가 ‘외부 합선’으로 오해해 버렸다. 국토부의 비닐백 규정은 황당한 동문서답(東問西答)이었던 셈이다.
현실적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항공화물에 적용하는 ‘충전율 30% 이하’ 규정을 활용할 수 있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화재 가능성이 충전율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고, 방재시험연구원의 실험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이다. 실제로 충전율 규정을 시행한 2016년 이후에는 리튬이온 배터리에 의한 화물기 화재 사고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항공화물에서 성공한 규제를 승객에게 적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보조배터리의 충전율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국토부의 변명은 비현실적인 궤변이다. 보조배터리에는 대부분 충전율을 알려주는 LED가 장착되어 있다. 물론 보조배터리를 비우는 일이 승객에게는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 화재 예방을 위해라면 기꺼이 협조할 수밖에 없다.
KC 인증 제도가 중국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보조배터리를 사용하는 소비자에게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속담이 훨씬 더 현실적인 조언이다. 탑승하기 전에 싸구려 보조배터리의 전기를 훨씬 더 안전한 휴대폰으로 옮겨두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