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한나라 말기, 전략적 요충지 익주를 다스리던 건 유비가 아닌 유장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방어지, 곡창지대로 불릴 만큼 자원도 풍부했다. 유장은 전쟁 없는 땅에서 태평을 누리며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좋은 입지를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
외적의 위협이 닥치자, 유장은 유비를 불러들였다. 힘을 빌려 적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스스로 기반을 유비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유비는 단순한 손님이 아니었다. 인재를 모으고, 민심을 얻으며 세력을 확장해갔다. 그 변화 앞에서 유장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혁신을 피하고, 안주를 택한 대가는 결국 몰락이었다.
글로벌 인공지능(AI) 삼국지가 전개되는 지금, 한국은 과연 어느 나라의 길을 걷고 있는가. ‘AI 3대 강국’을 외치지만, 국산 모델은 미완성에 가깝고, 그래픽처리장치(GPU)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하다. 스타트업은 자금과 인재난에 시달리고, 민간 생태계는 제각각 살아남기에 급급하다. 그 사이 글로벌 빅테크는 한국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토종 기업의 먹거리를 잠식하고, 유능한 두뇌를 흡수한다. 미국 스탠퍼드대 인공지능 연구소(HAI)가 발간한 'AI 인덱스 2024'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특허 출원 건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주목할 만한 AI 모델은 1개에 그쳤다. 이는 AI 인재의 유입보다 유출이 더 많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미 세계는 AI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미국은 조조처럼 기술과 자본을 기반으로 판을 설계하고 있고, 중국은 손권처럼 유능한 인재를 필두로 독자적 생태계를 구축해 자립을 꾀하고 있다. 유럽과 일본은 유비처럼 명분을 만들어 자신만의 전략을 만든다. 그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AI 천하를 노리고 있다. 그 가운데 한국은 아직 익주를 지키는 일조차 버겁다.
지금 필요한 건 유장의 관망이 아니라, 유비의 삼고초려다. AI 생태계를 위한 거시적인 전략과 인재를 영입하기 위한 적극적인 유인책이 필요하다. 국산 AI 반도체와 GPU 인프라에 대한 과감한 투자, 민간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공유 체계, 스타트업이 국내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규제 완화와 세제 지원도 시급하다. 기술 주권은 선언이 아닌 실행으로 확보되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 실행을 시작할 마지막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