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부동산] 경리단길의 아이들, 그 흥망성쇠

입력 2019-10-0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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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세보겠습니다.

경리단길, 망리단길, 송리단길, 쌍리단길, 중리단길, 평리단길, 해리단길, 행리단길….

경리단길의 이름을 따온 이른바 '◯리단길'들의 목록인데, 이것도 다 적은 게 아닙니다. 현존하는 ◯리단길은 이보다 많으며, 현재도 새로 생겨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로수길' 시리즈도 있습니다. 신사동 가로수길부터 시작해 그 양옆으로 늘어선 세로수길, 서울대학교 ‘샤’모양의 조형물 인근인 샤로수길…. 어차피 이름만 다를 뿐 ○리단길 들의 등장과 비슷한 현상이니 함께 다뤄보겠습니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이렇게 많은 ◯리단길이 생겨났을까요? 이 길들의 근황과 미래는 과연 어떨까요?

▲이곳이 바로 구 '육군중앙경리단'이자 현 '국군재정관리단'. 왼쪽으로 '경리단길'이 보인다. (뉴시스)
▲이곳이 바로 구 '육군중앙경리단'이자 현 '국군재정관리단'. 왼쪽으로 '경리단길'이 보인다. (뉴시스)

◇원조 ‘경리단길’

우리나라 국방부에는 군인들의 월급과 연금을 지급하는 부대가 있는데, 이 부대의 이름은 ‘국군재정관리단’입니다. 이곳은 이태원에 위치하고 있죠. 근데 옛날엔 육‧해‧공군이 재정 관리를 따로 했기 때문에 셋 중 가장 큰 육군의 부대인 ‘육군중앙경리단’이 이 자리에 있었다가 나중에 ‘국군재정관리단’으로 통합이 됐습니다.

경리단길의 이름은 ‘육군중앙경리단’의 ‘경리단’에서 따온 길입니다. 정확한 이름은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회나무로이구요. 이태원이라고하면 지금도 강남, 홍대 등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번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힙플레이스가 될 만한 기본 요건은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죠.

언론보도 등지에서 ‘경리단길’이라는 이름이 처음 쓰이게 된 것은 2009년경부터입니다. 이 당시부터 하나 둘씩 작은 규모의 오너 레스토랑과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자리 잡으면서 훌륭한 데이트코스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자리잡은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애초에 ‘해밀턴호텔 앞’으로 대표되는 이태원 최중심부의 높은 임대료와 권리금은 감당할 수가 없기에, 비슷한 규모와 성격의 카페와 식당들이 경리단길로 모여드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습니다.

▲번성했을 때의 경리단길. (출처=맛집 애플리케이션 '식신' )
▲번성했을 때의 경리단길. (출처=맛집 애플리케이션 '식신' )

2013년 즈음, 경리단길이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습니다. 이 당시 2030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경리단길은 가보지 않은 젊은 층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죠. 안 그래도 좁은 길목이 북적이는 사람에 미어터질 정도였습니다.

이 때, 경리단길과 관련한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발생합니다. 경리단길 2호기, 망리단길을 필두로 한 ◯리단길 들의 등장. 그리고 경리단길의 임대료와 권리금의 급작스러운 상승이었습니다.

◇경리단길의 아이들

‘경리단길’의 아류작(?) 중 가장 유명하기도 하고, 가장 선두로 등장하기도 한 힙플레이스는 망원동 ‘망리단길’입니다. 이곳은 '홍대-합정-망원'으로 이어지는 젊은 층 유동 인구가 보장된다는 점. 그리고 앞서 경리단길의 사례처럼 '홍대-합정'이라는 번화가 최중심부를 약간 비껴있기 때문에 임대료와 권리금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점까지 경리단길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이름부터도 ‘경리단길’을 따 ‘망리단길’이고요.

2016~2017년 경부터 젊은층이 어느 정도 방문하고, 임대료가 저렴한 지역엔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는게 유행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중림동 중리단길, 쌍문동 쌍리단길, 송파구 송리단길, 지방에서도 수원 행궁동의 행리단길, 경주 황남동 황리단길, 전주 객리단길 등…. 각지에서 각 지역만의 특색을 갖춘 힙플레이스가 생긴다는 점까지는 좋았습니다.

▲서울의 ◯리단길 중 하나인 쌍리단길. (이투데이DB)
▲서울의 ◯리단길 중 하나인 쌍리단길. (이투데이DB)

근데 이와 동시에 진행됐던 또 한 가지의 현상. 경리단길 상권의 성공이 주목받으며 이곳엔 투자자들의 자본이 모여들며 건물 매입과 리모델링 등의 붐이 일었습니다. 이곳을 테마로 한 상가 투자 설명회들도 속속 등장했습니다.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으니 투자 ‘수익’이 나야하겠죠.

이는 곧 권리금과 임대료의 폭발적 상승을 야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현재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알고 있을 상식 단어. ‘젠트리피케이션’이 등장한 배경입니다.

경리단길은 그렇게 쇠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일종의 유행처럼 떠올랐던 경리단길의 붐은 많은 유행이 그렇듯 슬슬 시들어버렸죠. 그렇다고 이곳에 투입된 투자 자본이 어디 간 것은 아니라서 권리금과 임대료는 이미 높아질대로 높아진 상태입니다. 각 점포들에겐 수익은 줄었지만 비용은 늘었다는 의미이므로, 폐업이 늘고 공실이 느는 악순환이 벌어졌습니다. 이 쇠락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리단길들은 인접한 대형 번화가가 있고, 인근에서 비교적 임대료와 권리금이 저렴하다는 비슷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들 ○리단길의 흥망성쇠 역시 비슷한 수순을 밟아가고 있습니다. 망리단길, 송리단길 모두 경리단길과 비슷한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을 밟아가고 있으며, 미래 역시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경리단길 근황'이라고 알려진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 '경리단길 근황'이라고 알려진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무엇이 문제였는가

'○리단길'들의 안타까운 쇠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뭘까요.

아름다운 골목길에 침입한 사악한 거대자본? 아닙니다. 자본은 원래 돈이 될 것 같은 데 불법만 아닌 무엇인가가 있다면 어디든 들어가는 것이 본연의 속성입니다. 인스타에 ○리단길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며 입소문낸 사람들? 역시 아니죠. 인스타에 유행을 올리는 것도 죄가 되나요? ○리단길을 찾았던 방문객들? 이들은 상권의 부흥기를 열어준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습니다.

진짜 원인은 이들 길의 부흥 당시 ‘젠트리피케이션’이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거대 사회 이슈로 떠올랐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솔루션이 전혀 없었던 것이죠.

지금은 있을까요? 아니요. 유시민 작가가 ‘알쓸신잡’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 역사상 ‘젠트리피케이션’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데 성공한 사례는 없습니다. 그럼 지금의 ‘○리단길’들과 앞으로의 ‘○리단길’들의 운명도 비극으로 끝나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사회는 없지만, 많은 사회가 과거에 비해 훨씬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어도 경감시킬 수는 있겠죠. 구조상 자연적으로 경감될 수 없는 문제라면 관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결의문을 낭독하는 성동구의 공인중개사들. (뉴시스)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결의문을 낭독하는 성동구의 공인중개사들. (뉴시스)

서울 성동구의 거듭된 상생협약은 주목해 볼 만 합니다. 건물주, 세입자, 성동구가 협약을 맺고, 임대료 인상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지역 상권 진흥을 위해 함께 머리를 모으는 것이죠. 젠트리피케이션을 오래 연구해왔다는 정원오 성동구청장의 역점 사업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엔 전주 객리단길에서도 유사한 상생협약식이 있었습니다. 역시 건물주와 세입자, 전주시의 3자 간에 임대료 안정과 상권 보호 등을 다지는 협약이었죠.

물론 이런 상생협약식에는 강제성이 없습니다. 건물주가 내 건물 임대료 올리겠다는데, 세입자가 내 장사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공권력이 무언가를 강제하겠습니까.

그렇다하더라도 효과는 있을 것입니다. 관이 개입하는만큼 최소한 눈치를 봐서라도 임대료 상승이 억제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또한 경리단길, 망리단길 등의 사례에서의 학습 효과 역시 있었을테니까요. 상생협약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상가임대차보호법 등의 지속적인 개정을 통한 제도적 안전망도 지속적으로 연구해 뒷받침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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