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춘욱의 전쟁을 바꾼 경제 이야기] 17세기 네덜란드 독립 이끈 두가지

입력 2020-04-0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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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제식훈련으로 스페인군을 무찌르다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전쟁은 냉혹한 스승”이라고 말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여러 전쟁에서 승패를 가른 요인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위대한 장군이나 용맹한 병사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돈’으로 승자와 패자가 나뉜 경우가 많다. 획기적인 전략·전술이나 우월한 무기체계 등의 요인도 결국 전쟁 외부에 있는 경제적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투데이는 ‘전쟁을 바꾼 경제 이야기’를 통해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지은 몇몇 전쟁과 그 이면의 경제적 배경을 살펴볼 예정이다. 필자인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이코노미스트다.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경제학으로 석사·박사를 받았다. 인문학적 주제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하거나, 경제학적 주제를 통해 인문학적 의미를 발견하는 글 등 다수의 글을 써 왔다.

군 복무했던 한국의 남성들에게 “군 생활 중에 가장 기억나는 게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여러 답변이 나올 것이다. 화생방부터 유격 훈련까지 다양한 답변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질문을 바꿔 “가장 쓸데없는 짓이 무엇이라 생각하나?”라고 물으면, 아마 가장 많이 나올 답변이 제식훈련일 것이다. 연대장 혹은 대대장 앞에서 행군하고 또 좌우로 방향을 바꾸는 과정에서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또 실수를 저지르면 단체로 혼나면서 훈련 시간이 한정 없이 길어진 경험을 누구나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훈련을 받으면서 누구나 입이 댓 발 나왔고, 그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동일한 한탄을 담고 있었다.

제식훈련은 언제, 왜, 어떻게 생겨났을까? 제식훈련을 개발한, 아니 정확하게는, 발굴한 사람은 17세기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지도자, 나사우의 마우리츠 백작(Maurits van Nassau)이었다. 먼저 당시 배경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67년 네덜란드 사람들이 독립의 깃발을 높이 들 때, 스페인은 세계제국을 건설한 직후였다. 스페인은 신대륙의 막대한 식민지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을 지배하는 세계 최강의 나라 중 하나였다. 특히 볼리비아의 포토시, 그리고 멕시코의 사키테카스 은광 발견으로 막대한 재화를 확보했기에 스페인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강력한 군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군은 이른바 테르시오 방진이라는 혁신적인 시스템을 채택하여 ‘무적 행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게 다 용병을 고용할 수 있는 경제력 때문이었다.

‘제국’ 스페인과 80년 독립전쟁

그러나 당시 스페인을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자제력’을 갖지 못했다. 거대한 영토와 매년 수천 아니 수만 톤에 이르는 은이 유입되다 보니,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그 결과 매년 전쟁이 되풀이되었고, 또 전쟁의 승리는 불확실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육상에서 스페인군은 무적이었지만, 바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는 베네치아 함대와 연합해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함대를 격파할 수 있었지만, 1588년 영국을 정벌하기 위해 출발했던 무적함대는 처참한 패배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즉 네덜란드 지방에서 세금을 거둬 전쟁 비용을 조달할 계획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 사람들도 왕에게 세금을 곧잘 바쳤지만, 점점 세금 부담이 커지면서 마찰이 발생했다. 특히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가톨릭 세력의 맹주로 적극적으로 종교전쟁에 뛰어든 반면, 네덜란드 북부지방은 개신교의 세력이 컸다는 게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1567년 반란의 불길이 네덜란드에서 치솟았고, 스페인은 군대를 파견하면서 80년에 걸친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테르시오 방진을 깨기 위한 화승총

전쟁 초기에는 스페인의 압도적인 강세가 이어졌다. 오랜 전쟁으로 잘 단련된 장군, 그리고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해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의 용병을 고용할 수 있었기에 스페인의 승리는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초기 스페인군이 중립파 귀족들을 처형하는 등 잔혹한 행동을 보이면서 민심을 잃은 데다, 스페인이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터키 등과 연이어 전쟁을 벌이면서 네덜란드도 반전의 계기를 잡을 수 있었다. 특히 1587년부터 독립전쟁을 지도한 나사우의 마우리츠 백작이 도입한 새로운 전술은 전황을 돌려놓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17세기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마우리츠 백작.
▲17세기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마우리츠 백작.

마우리츠 백작은 당시 스페인 군대가 채택한 주력 전술, 테르시오 방진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화승총(및 머스킷총)을 적극적으로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러나 이때 당시 화승총은 대단히 써먹기 어려운 골칫덩어리였다. 왜냐하면 일단 사용방법이 너무 어려웠다. 총을 쏘기 위해서는 먼저 총구에 화약, 뭉치, 총알, 몽치 순으로 장전하고 꽂을대를 사용해 다져 넣고 다른 종류의 화약을 약실에 넣은 후에 불이 붙은 화승을 격발 장치에 붙이는 식으로 이뤄졌다. 이 복잡한 과정 중 하나만 틀려도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통제·훈련 ‘군사개혁’으로 승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은 대안이 바로 조직적인 훈련이었다. 그는 화승총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복잡한 움직임을 42개로 나누고, 각 동작마다 이름을 붙인 것은 물론 해당 동작을 하도록 명하는 적정한 구령까지 정했다. 42단계의 구분동작을 반복 훈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혁신은 바로 ‘제식훈련’이었다. 마우리츠는 서로 발을 맞춤으로써 모든 부대원이 미리 정해진 형식에 따라 전후좌우로 이동하여 종대에서 횡대로, 다시 종대로 대형을 바꿀 수 있게 만들었다. 특히 제식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후진’이었다. 화승총을 든 병사들이 방진을 짜고 전투에 임했을 때, 맨 앞 열의 병사가 총을 쏜 후 자기가 속한 대열의 제일 뒤로 달려가서 재장전하는 동안 두 번째 열의 병사가 총을 쏘는 것이다. 연습을 거듭하고 방진을 적절하게 조정하면, 연속적인 일제사격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 전술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총탄이 날아다니고, 적의 창병이 돌격해오는 상황에서 열의 제일 뒤로 이동하던 병사가 도망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우리츠 백작은 두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첫 번째 방법은 지휘관이 통제하기 쉽게 부대의 규모를 줄이는 한편, 하사관 제도를 도입해 병사들이 전열에서 이탈해서 도망가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훨씬 효과적인 두 번째 방법은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군대를 훈련시킴으로써 병사들 사이에 원초적이고 매우 강력한 사회적 유대를 형성시키는 것이었다. 깊은 유대감을 가진 병사들은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극단적인 상항에서도 명령에 복종하고, 또 전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적진으로 돌격하는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병사들의 제식훈련 구분동작을 묘사한 동판화.
▲병사들의 제식훈련 구분동작을 묘사한 동판화.

마우리츠의 개혁은 네덜란드의 독립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수많은 나라에 강한 자극을 주었다. 스페인과 상시적인 전쟁상태에 있었던 프랑스가 제일 먼저 네덜란드의 훈련법을 채택했고, 특히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Gustav II Adolf)는 네덜란드의 훈련법에 신형 대포를 적극 활용하는 전술을 개발하여 30년 전쟁(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의 군대가 다른 지역 군대와 만나 거의 패배하지 않은 이유가 화약 무기의 지속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상대의 눈동자가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에서도 도망가지 않는 전투집단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훈련법에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병력 훈련비용 ‘경제력’이 뒷받침

다만 네덜란드의 개혁을 모든 유럽 나라가 모방할 수는 없었다. 네덜란드처럼 부유한 나라가 아니고서는 오랜 기간 병력을 훈련시키는 데 필요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우리츠 백작의 성공은 그가 군사전략의 천재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구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재원이 뒷받침될 수 있는 환경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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