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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시선] 봄날 오후에 읽은 시집

입력 2020-03-25 17:54

시인, 인문학 저술가

오늘날 시의 효용성과 가치를 따지는 일만큼 부질없는 짓은 없을 테다. 시가 돈도 밥도 명예도 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공작이 펼친 깃털이 아름답다고 굶주린 자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시는 공작 깃털과 다를 바 없는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한 줌의 언어는 무력하고, 무력하고, 무력할 뿐이다. 밤과 바다, 무덤과 아침 이슬, 나뭇잎과 뿌리의 아름다움과 비밀을 누설하는 시가 식탁 위 후추통보다 더 쓸모없다는 게 중론이다. 쓸모없는 아름다움을 섬기는 시가 현실의 공리적 필요에 부응하지 못함을 부정할 수 없다. 시는 굶주림, 전염병, 인종청소, 전쟁, 폭력, 이념 갈등 같은 세상의 부조리와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시는 끊임없이 씌어져서 굶주린 새떼같이 독자를 찾아 날아간다. 시는 흡혈조가 되어 독자의 피를 훔치고, 저 너머 어딘가에 무지개가 있다고 노래하리라. 하지만 우리는 불행과 맞서 싸우느라 미처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다.

어떤 이는 시인이란 백해무익한 종자라고 단정을 짓는다. ‘인간을 찾는다’고 대낮에 등불을 든 채 아테네를 누비는 디오게네스의 후예라니! 시인이란 그토록 하염없는 존재들이다. 놀라워라, 우리는 한 해에 시집이 3000종 이상이 쏟아져 나오는 나라에 산다. 이토록 기이한 시의 부흥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정작 그 많은 시집들이 다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시는 말들의 의식(儀式), 하나의 이야기, 기도, 초대. 아무런 현실감 없이 독자에게 흘러가서 마음을 흔드는 진짜 반응을 일으키는 말들의 흐름.”(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시는 이야기, 기도, 초대, 말들의 흐름이다. 이 마음에서 저 마음으로 흘러가서 파동을 일으키는 말들. 그렇지 않다면야 시집 양산은 쓸데없는 노고와 종이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시는 메아리가 없는 외침이요, 목청껏 울지도 날개 쳐서 날지도 못하는 병풍의 수탉이요, 아무것도 낳지 못하는 그림자의 짝사랑에 그치고 만다.

많은 시인들이 문학잡지와 출판사에 시를 투고하나 게재나 출판을 거절하는 편지를 받는다. 시인들은 꿋꿋하게 써서 다시 잡지사에 보내고 시집을 묶어낸다. ‘목적 없이 혼자만을 위한 시’의 양산은 오늘날 시가 처한 가난한 운명을 보여준다. 램프에게 제 시를 읽어주는 시인이여! 그 램프마저 시에 귀를 닫을 때 그저 말없이 빛을 보내주는 것에 기뻐하는 시인이여! “그래서 목적 없이 혼자만을 위한 시를 써서/머리맡 탁자에 놓인 램프에게 읽어 준다./아마도 램프도 내 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말없이 빛을 보내 준다. 그것만으로 족하다.”(헤르만 헤세, ‘편집부에서 온 편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고, 문학상을 여럿 받은 시인조차 한 세대 뒤 시는 다 잊히고, 백년 뒤엔 이름조차 망각에 묻힐 게 분명하다. 세월의 풍화를 견디고 살아남는 시인은 한 세기에 몇 명뿐이다. 그러니 자기 시가 불멸할 거라고 믿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거나 치매가 아닌지를 검사해봐야 하리라. 미국 의회도서관의 계관시인으로 뽑힌 도널드 홀은 이렇게 말한다. “시인들 스스로 자기들의 시가 영원불멸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우울증에 걸렸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정신병자일 것이다.”(도널드 홀, ‘죽은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주말 오후에 한 시인의 시집 두 권을 택배로 받았다. 아주 오래전, 스물을 갓 넘긴 앳된 시절에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한 젊은이를 기억 속에 소환했다. 그 뒤 어떤 곡절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무려 마흔 해나 몸을 숨기고 사라졌던 시인 장석이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시집 두 권을 상재하며 돌아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온 첫 시집 ‘사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이니’와 두 번째 시집 ‘우리 별의 봄’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해가 기울어 사위가 어두워진 것도 모른 채 후루룩 통독을 한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절멸과 불모의 세월이 그를 짓밟고 지나갔던가? 우리는 그의 과거 편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얼핏 “황금과 이름과 자신의 신을 위해/뱃머리로 바다의 살을 길게 베면서 떠난 이래의/그리고 그 벌어진 상처에/은과 후추와 사람의 피와 기도를 부으며 다닌 이래의/그의 삶의 이력을 알아야 하는가 보다”(‘기차역 매표소’) 같은 구절을 통해 삶의 이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그는 “우는 자와 울리는 자 중에 누가 슬픈 것인가”(‘슬픔’)를 묻는다. 삶의 시와 시의 삶은 다르지 않을 테다. 시집 두 권을 한 자리에서 읽고 나니, 어떤 명현 현상이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하다. 이마가 반듯한 청년이 까만 머리가 반 너머는 희게 변한 초로가 되어 나타난 데는 어떤 곡절이 있었던가를 굳이 캐고 싶지는 않다. 경악과 황망 중에 흘러갔을 그 세월 동안 그이는 “우주론을 읽고/별자리 지도도 펼쳐”(‘별에게 2’)보고, 더러 망각의 갈피를 뒤적이면 “기억도 나지 않는 누군가에게 주었던 마음/아무런 후회 없이 버렸던 약속/맡기고 찾지 않아 소멸한 소망”(‘말미를 다오’)도 없지 않겠으나, 이것들은 “비바람과 짐승에 맨몸뚱이로 맞섰던 젊음/가방 안에 놓고 다녔던 계획과 비망록”(‘말미로 다오’) 따위와 더불어 잊어야 하리라.

“나는 이제/해가 나의 뒤로 돌아가기를 기다린다//내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멀리 있는 숲이 시작하는 이야기를/읽으려 한다//줄기와 잎들과/대목대목 새들도 불러/노래하듯 써가는 책을//이른 아침의 항구에/완만하게 와 닿는 배처럼//숲은 아주 천천히/여름내 푸른 이야기의 책을 써다오//나는 색맹이 다 되도록 읽다가/눈 어두운 사람이 되도록 읽어나간다/책갈피마다 희고 붉은 꽃을 놓고/달과 별의 불도 밝히고//그대를 불러/내 그늘에 함께 앉겠다//여전히 숲의 책 노래 들으며”(‘여름의 책’ 전문)

‘여름의 책’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멜랑콜리가 달콤한 시다. 여름은 빛나는 햇빛이 쏟아지고, 여름숲의 뻗치는 기운은 푸르고 푸르러서 뭇 생명의 번성에 보탬이 될 것이다. 여름은 혈기방장하나 지혜와 분별은 모자라는 젊음과 닮았다. 젊음이 그렇듯이 여름은 빨리 끝난다. 실처럼 가느다란 뱀장어 새끼들은 자라서 바다로 나가고, 젖먹이 어린 것은 살이 오르고 옹알이를 시작한다. 여름이 불꽃의 생을 마치면 어느덧 가을의 소슬한 빛이 대지에 날개를 드리운다. ‘여름의 책’은 미처 완성되지 못한다. 누가 완성을 자신하는가? 애초에 삶에는 완성이란 없다. “비바람과 짐승에 맨몸뚱이로 맞섰던 젊음/가방 안에 넣고 다녔던 계획과 비망록”(‘말미를 다오’)이 남아 있을 다름이다. 이제 그늘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서 “멀리 있는 숲이 시작하는 이야기를” 경청하려고 기다리는 이의 눈빛은 순할 테다. 숲에게 “여름내 푸른 이야기의 책을 써다오”라고 부탁한 이는 더 이상 젊지 않다. 벌써 눈이 어두운 사람이 되었건만 ‘여름의 책’을 읽겠다는 의지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여전히 “그대를 불러” 그늘에서 함께 숲과 새들이 “노래하듯 써가는 책”을 읽으려고 한다.

먼 바다를 떠돌다가 고향 바다로 회귀하는 신호탄이 될 장석의 시집에는 여린 것들을 품고 기르는 세월 동안 흔들고 가늠해본 제 깜냥과 명운의 부피와 무게가 고스란히 적재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 시들이 명치께에 뻐근한 통증 따위를 줄 리가 없다. 세상의 시절 인연은 그게 아무리 하찮고 모자란 구석이 있는 것일지라도 우리 몸피를 키우는 데 살과 젖과 피를 떼어주고 마른 혀 위로 흘려보내었으리라. 오, 회한 가득한 젖은 목소리로 “세상은 하나의 꽃이었는가”(‘그대가 산으로 오르는 첫 기차를 타려면’)라고 묻고,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던 이”(‘화엄제’)였음을 되새김질하며 곱씹어봐야 한다. 그게 사람다운 노릇이다. 그게 올바름 위에 제 삶을 창건하는 일이다. 봄날 오후에 읽은 시집 두 권은 청춘을 덧없이 흘려보낸 자의 별사(別辭)요, 차마 아무도 모르게 태워버릴 수 없었던 비망록이자, 가슴 한쪽에서 철철 끓며 넘치다가 어느덧 마른 자취만 남은 사랑의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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