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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_인터뷰] "가정의 희생으로 얻은 시간, 한순간도 낭비할 수 없었다"

입력 2019-11-13 13:59 수정 2019-11-13 14:25

한국 최초 메가 FTA인 RCEP 타결의 주인공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을 만나다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여성이 자신이 그 위치까지 가는 길에 생긴 가족의 희생을 미안해한다. 그는 가정을 지키며 일을 한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은 숙제라고 말한다. 여성 후배들에게 일과 가정을 함께 지키라는, 어찌 보면 허황될 수도 있는 조언은 하지 않는다. 본인도 자기 업무와 관련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올 때까지 가족의, 아이의 희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한다. 그 이후에 여성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과 가정에 대한 균형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경험 섞인 다독거림을 내놓는다.

4일 한국 최초의 메가 자유무역협정(FTA)이자 세계 최대 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타결됐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서는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에서 구축되는 새로운 통상질서 속에서 안정적인 교역ㆍ투자 기반을 확보해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이어갈 기회를 얻을 것으로 기대가 크다.

한국 통상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순간의 중심에 한 여성 공무원이 서 있다. 여성 공무원으로 최초 타이틀을 몇 개나 보유한 한국 통상 분야의 수장인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다.

유 본부장은 한ㆍ미 FTA 개정 협상 수석대표를 비롯해 한ㆍ싱가포르, 한ㆍ아세안 FTA, 이번 RCEP 협정 타결까지 굵직한 협상을 직접 몸으로 부딪쳐 온 ‘최고의 협상 전략가’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사진제공=산업통상자원부)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사진제공=산업통상자원부)

◇파격 인사의 아이콘… 산업부 70년 역사 ‘1호 여성 차관’ = 유 본부장은 파격 인사의 아이콘으로 유명하다. 행정고시 35회에 합격해 1992년 총무처 중앙공무원교육원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지켜보며 국내 통상 전문가의 필요성을 느끼고 1995년 통상산업부로 옮기면서 줄곧 통상 업무를 맡았다.

통상 업무를 하려면 법률 지식이 꼭 필요하다고 여긴 그는 1999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로스쿨 3년 과정을 끝낸 뒤 미국 뉴욕주와 워싱턴에서 변호사 자격증도 땄다.

2005년 1월 자유무역협정(FTA) 정책과장에 발탁됐다. 당시 외교부 과장급이 1986~1988년에 공직 생활을 시작한 외시 20~22회 출신인 점을 고려하면 외시 26회와 같은 기수인 유 본부장의 과장 임명은 4~6년은 빠른 파격 인사였다.

이후 한ㆍ미 FTA 개정 협상이 진행 중인 지난해 1월 통상교섭실장으로 승진했다. 산업부 역사 70년 만에 처음으로 ‘공무원의 꽃’이라고 불리는 1급 여성 공무원이 탄생한 것.

당시 업무와 관련해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한ㆍ미 FTA 개정 협상 수석대표인 유 실장의 실력을 인정, 협상 중 농담으로 유 실장에게 자리를 제안했다는 후문은 유명하다.

그는 올해 2월 차관급이자 대외적으로는 장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에 오르며 다시 한번 유리천장을 깼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떠나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약력이다.

◇“가정과 일을 함께한다는 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숙제” = 궁금했다. 가정과 아이가 있는 여성으로서 어떻게 이렇게 치열하게 살 수 있었는지가.

11일 정부세종청사 집무실에서 만난 그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답변은 신선했다. 흔히 ‘일과 가정 모두를 지키기 위해 어떠어떠한 노력을 했다’라는 상식적인 답변이 아니었다.

유 본부장은 “공직생활 초창기에는 가정에 대한 노력보다 일을 더 많이 했다”며 “처음이라는 시기는 누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평판을 처음 쌓는 기간으로 힘들더라도 더 일에 적극적이고 열심히 해야 학습 속도도 늘어나고 본인의 평판도 더 쌓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는 정말 애가 입원을 했을 때도 내색하지 않고 계속 출근과 야근을 했을 정도로 일을 통해서 더 많이 보여주려 했다”고 회상했다.

유 본부장은 “내 노력이 쌓여 어느 정도 평판을 구축하는 시기, 개인차가 있겠지만 3~5년 정도가 지나면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과 가정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일을 한 지 28년 되고 가정을 가진 지도 28년이 됐지만 지금도 힘들 때가 있다”며 “통상이라는 게 공부를 계속해야 해서 가정과 균형을 잘 이룬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은 숙제로 여겨진다”고 덧붙였다.

유 본부장은 “전 아직도 여자 후배들한테 처음 시작할 때는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 승부를 해라. 그게 쌓이면 그걸 바탕으로 가정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는 모습이 이해를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와 함께할 순간을 포기하고 얻은 시간, 최선을 다해 보내야 = 이렇게 말하는 그도 아이가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미안한 마음이 먼저 앞선다고 얘기한다.

유 본부장은 “사무관 시절 큰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 엄마가 제일 안 오는 아이들을 모아서 지하방으로 내려갔다. 근데 애가 그때가 그렇게 싫다고 하더라. 한번은 지하방으로 내려가다 토하기도 했다. 어느 날 조금 일찍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아이가 지하방으로 내려가는 중에도 문만 쳐다보고 있더라.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며 “그 모습을 보면서 아이의 희생이 값어치가 있도록 내가 정말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이 경험 때문일까. 유 본부장은 합리적ㆍ효율적 업무 문화를 계속 강조했다.

유 본부장은 “나의 시간도, 젊은 후배들의 시간도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해서 나오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까 훨씬 더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애쓰게 되더라”며 “합리적ㆍ효율적으로 일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조직도 건강해지고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사진제공=산업통상자원부)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사진제공=산업통상자원부)

◇“한 사람의 통상전문가를 만들기 위한 국가의 투자, 사회에 환원하고파” =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온 그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유 본부장은 “우리나라 국기를 앞에 두고 다른 나라와 협상을 하는 게 통상 업무인데 한 사람의 통상 협상 전문가를 만들기 위해서 국가가 투자한 시간을 생각하면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며 “현재에 충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 쌓고 익히고 한 것들이 국가가 투자한 것과 제가 노력한 것이 합쳐진 것으로 나 혼자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이 됐건, 어떤 기구에서 봉사를 하는 일이 됐건 나의 경험과 노하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유 본부장은 여성 후배들에게 긴 호흡을 갖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유 본부장은 “처음에는 무리해서라도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 가정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해야 하지만 진짜 가정에 어려움이 있는 순간에 자기 혼자 뒤처지는 것 같아도 속도를 조절해야 할 때가 있을 수도 있다”며 “그 순간 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자기만의 속도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긴 호흡으로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인정을 받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회를 잡기 위해선 우선 자기 실력이 돼야 한다”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실력을 키우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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