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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섭의 중국 경제인열전] 장사의 신 ‘상신(商神)’으로 추앙된 호설암(胡雪巖)

仁에서 이익을 구하고, 義에서 재물을 구하다

친구 한 명 사귀면 길이 하나 늘어난다

호설암(胡雪巖·1823-1885)의 본래 이름은 광용(光墉)이며, 자는 설암(雪岩)이다. 그는 안휘성(安徽省)의 적계(績溪)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안휘성은 역사적으로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호설암은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자, 12세에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항주(杭州)에 있는 금융기관인 신화전장(新和錢庄)에 취직하였고 3년 만에 정식 직원이 되었다.

그렇게 그가 막 21세가 되던 어느 날, 애초 돌려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던 은자 500냥의 빚을 받아냈다. 당시 이부(吏部)에서 발행하는 증서를 사게 되면 관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빈손으로 가도 주인에게 큰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그 돈을 밑천으로 큰 투자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 무렵 자주 가던 찻집에서 왕유령(王有齡)이라는 손윗사람을 알게 되었다. 왕유령은 복주(福州) 사람으로 아버지를 따라 절강(浙江)에 왔다가 항주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왕유령의 아버지는 그만 병을 얻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왕유령은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처지인지라 계속해서 항주에서 객지생활을 하고 있었다. 실업자 신세였고, 몰골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왕유령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호설암이 왕유령을 만나 관직을 사주겠다고 하자, 왕유령은 크게 놀라며 거절했다. 이렇게 큰돈을 빌리는 데 보증을 서줄 사람도 없었고 또 갚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호설암의 진심을 파악한 왕유령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땅에 엎드려 절을 하려고 했다. 호설암은 그런 그를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서로 사주를 적은 종이를 교환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호설암은 술상을 푸짐하게 차려 왕유령의 성공과 금의환향을 기원했다. 다음 날 왕유령은 북경(北京)으로 길을 나섰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공금횡령에 속하는 행위였다. 결국 그 사실이 발각되어 호설암은 해고되었다. 다행히도 호설암 덕분에 왕유령은 중앙정부의 관리에게 줄을 대어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유령은 절강성으로 전임되었고 계속 벼슬이 올라갔다. 호설암은 부강전장(阜康錢庄)을 열었고, 그의 사업은 더욱 번창하였다.

얼마 뒤 그의 전장은 20여 개에 이르렀다. 또 왕유령의 도움으로 저장성의 군량미 운반과 병기 군납을 독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호설암은 절강성 제1의 거부가 되었다.

훗날 그는 “친구를 한 명 사귀면 길이 하나 늘어나지만, 적을 한 명 만들면 담장이 하나 더 생긴다. 내 성공의 비결은 남들이 감히 데려다 쓰지 못하는 인재를 과감히 받아들인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황제가 붉은 모자와 황마고자 하사

그 뒤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였다. 양유령은 그 사나운 공격에 패퇴하고 결국 자결하였다. 순식간에 기댈 언덕을 잃게 된 호설암의 앞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좌종당(左宗棠)이었다. 좌종당은 왕유령의 후임으로 임명되어 태평천국군 진압의 중책을 맡았다. 하지만 당시 좌종당이 이끄는 군대는 군량미를 보급받지 못한 지 이미 대여섯 달이 넘어가면서 굶어 죽는 자와 전쟁으로 죽어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때 호설암은 불과 3일 내에 10만 석의 양식을 좌종당의 군대에 보내주면서 좌종당의 확실한 신임을 얻었다.

좌종당의 지원하에 그는 상인 겸 관원의 신분으로 영파(寧波)와 상해(上海) 등 항구들의 통상업무도 담당하면서 좌종당 군대의 신식 군사훈련을 지원하였고, 서양식 총기와 대포로 무장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좌종당 군대는 태평천국군을 절강성에서 완전히 소탕한 뒤 모든 물자를 호설암의 전장(錢庄)에 맡겼다. 그는 이 자본을 바탕으로 각 도시에 잇달아 점포를 내 그의 점포는 20여 개에 이르렀다.

그는 국가의 공식적인 공무에도 참여하여 상해채운국(采運局)을 관장하였고 복건선정국(船政局)도 겸임하였다. 상인이면서도 고위 관직을 겸하는 인물이 된 것이었다. 황제 총애의 상징인 붉은 모자(紅頂)와 황마고자를 하사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편 호설암은 항주에 거금 20만 냥을 투자해 호경여당(胡慶餘堂)이라는 약방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 약방을 북경의 동인당(同仁堂)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전통 제약회사로 키웠다. 그는 “약업은 생명과 관련된 것이므로 절대로 속이지 말라”면서 ‘속이지 말라’는 뜻의 ‘계기(戒欺)’라는 글자를 편액으로 만들어 걸도록 하였고, 또 진심과 성의로 약을 제조하여 신용을 지키겠다는 ‘진불이가(眞不二價)’라는 글자도 같이 걸도록 하였다.

호경여당은 비록 역사는 짧았지만 동인당과 같은 전통 있는 약방과 경쟁하기 위하여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아 특히 탕제(湯劑)와 조편(組片) 분야에서 당시 세계의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 벽온단(僻縕丹)이나 팔보홍령단(八寶紅靈丹), 제갈행군산(諸葛行軍散)과 같은 명약을 만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태평천국의 난이 실패로 끝난 뒤 각지에 전염병이 돌자 호설암은 약을 무료로 제공하였으며, 서북 지역으로 출정한 좌종당의 병사들이 풍토병에 걸려 질병이 확산될 때도 약재를 대대적으로 지원하였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타고난 장사 수완을 발휘하여 청나라 최고의 거상이 된 호설암.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환전상, 찻집, 견직물 가게, 약방, 소규모 은행 등 여러 경제 분야에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중국인들로부터 ‘장사의 신’ ‘살아 있는 재물의 신’, 즉 ‘활재신(活財神)’ 등으로 칭해지며 ‘상성(商聖)’으로 숭배받는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타고난 장사 수완을 발휘하여 청나라 최고의 거상이 된 호설암.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환전상, 찻집, 견직물 가게, 약방, 소규모 은행 등 여러 경제 분야에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중국인들로부터 ‘장사의 신’ ‘살아 있는 재물의 신’, 즉 ‘활재신(活財神)’ 등으로 칭해지며 ‘상성(商聖)’으로 숭배받는다.

이익을 얻은 뒤 반드시 베풀다

호설암은 “인(仁)에서 이익(利)을 구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군자이고, 의(義)에서 재물을 구하는 자가 진정한 대장부다”라는 상경지도(商經之道)를 온몸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단지 이익을 올리는 데 끝나지 않고 수십만 구에 이르는 시체를 거두어 주었고 굶주린 백성들을 돕는 구빈소를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전란으로 움직이지 못했던 마차를 다시 통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호설암의 명성은 천하에 널리 퍼져 나갔고, 그의 사업도 더욱 번성해졌다.

그 뒤 서북쪽 신강(新疆) 지역이 불안해지자 조정은 좌종당으로 하여금 출정하도록 했는데, 식량조차 보급이 되지 못하였다. 이때 호설암이 나서서 서양으로부터 차관을 빌렸으며, 대규모 약재도 보급하는 등 신강지방을 안정시키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는 국가가 있어야 비로소 사업도 존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일본에 두 번 방문했을 때도 일본으로 몰래 빼돌려진 국보급 문화재를 높은 가격을 치르고 다시 사들여 중국에 들여왔다.

호설암은 그 밖에도 각지에 극심한 가뭄이 발생하자 기꺼이 자금을 보냈다. 이렇게 그가 내놓은 재산만 해도 20만 냥에 이르렀다.

▲호설암이 항주에 거금 20만 냥을 투자해 설립한 약방 호경여당(胡慶餘堂).
▲호설암이 항주에 거금 20만 냥을 투자해 설립한 약방 호경여당(胡慶餘堂).

빈손으로 일으켰고, 마지막에도 빈손

1882년 그는 상해에 잠사(蠶絲) 공장을 설립하였다. 당시 생사 가격이 계속 폭락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러한 현상이 중국 상인들 간의 과도한 경쟁으로 외국 상인에게 가격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호설암은 높은 가격으로 잠사를 대규모로 사들였고, 마침내 최초로 중국 상인과 외국 상인의 상업전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국내 비단을 독점적으로 매입한 호설암이 주도권을 쥐면서 서양 상인들은 몸이 달았다. 이제 호설암의 압승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이 해에 뜻밖에도 이탈리아에서 생사가 대풍년을 거두었다. 호설암과 서양 상인 간에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쟁의 추는 급속히 기울었다. 다음 해 여름, 호설암은 결국 헐값으로 생사를 팔아치워야만 했다. 그는 무려 1000만 냥의 손실을 입었다. 사방에서 예치금을 찾으려는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그해 11월, 마침내 각지의 점포는 문을 닫고 집도 처분했으며 호경여당도 주인이 바뀌었다.

얼마 뒤 호설암도 세상을 떠났다. 빈손으로 일어나 천하의 재물을 한 손에 거머쥐었던 호설암은 그렇게 다시 빈손으로 이승을 떠나갔다.

호설암은 살아 있을 때 이미 ‘살아 있는 재물의 신’, 즉 ‘활재신(活財神)’이라 칭해졌다. 그는 황제로부터 상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붉은 모자를 하사받은 최초의 홍정상인(紅頂商人)이었다.

근대 중국을 대표하는 지성 노신(魯迅)은 “호설암이야말로 봉건사회의 마지막 위대한 상인이다”라고 극찬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백 년도 훨씬 지났지만 많은 중국인들은 여전히 그를 장사의 신, 상신(商神)으로 모시고 있다.

소준섭 국회도서관 조사관 opinio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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