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32. 시대를 따라가야 살아남는다

입력 2019-01-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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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연구소장

요즘 전철 풍경(風景)을 예전과 비교하면 가장 달라진 것이 종이 신문을 보는 사람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십년 전만 해도 옆 사람에게 혹여 방해될까 하여 세로로 접어서 보고 다 읽으면 머리 위 선반에 올려놓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말이다. 신문은 종이 신문으로 읽어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는 나조차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보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한다. 나도 신문도 시대를 따라가야 살아남는다.

1959년 셰퍼가 내놓은 ‘PFM(Pen For Men)’은 이름처럼 남자들을 위한 펜이었다. 마름모꼴의 펜촉, 유선형의 크고 굵은 몸체를 갖고 있었지만 뚜껑과 몸통의 끄트머리는 사각, 클립 역시 긴 직사각형 모양인 것은 누가 봐도 남성용이었다. 광고 역시 손마디가 굵고 털이 송송 있는 남성의 손으로 만년필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만약 내가 여성이라면 이 만년필을 사고 싶을까?

세상의 절반을 포기한 셰퍼의 전략이 궁금하다. 사실 이상한 마케팅인 것은 틀림없지만 1년 전 내놓은 ‘레이디 셰퍼’를 보면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다. 회사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레이디 퍼스트란 말이 있으니 레이디 셰퍼를 먼저 내놓고, 남성들한테는 PFM을, 여성에겐 레이디 셰퍼를 파는 전략(戰略). 하지만 이 전략은 실패했다. 레이디 셰퍼를 여성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뚜껑에 클립 없이 19개의 다양한 모델이 있었지만, 이 만년필이 성공하지 못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레이디가 붙은 이름 자체가 신선하지 않았고, 클립이 없는 것 또한 구시대적인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1930년에 워터맨에서 클립 없는 레이디 페트리샤란 이름의 만년필이 있었다. 결국 이 레이디 셰퍼는 1963년까지 단 4년간 생산되었을 뿐이다.

▲쉐퍼 PFM의 1959년 광고.
▲쉐퍼 PFM의 1959년 광고.
1920년대부터 파커의 둘도 없는 라이벌로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낸 셰퍼가 왜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 셰퍼는 파커에 계속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누적 생산이 5000만 개에 이를 정도로 큰 회사였지만, 파커51의 파커에 셰퍼는 이런저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추형의 펜촉에 기다란 빨대 같은 대롱이 나와 잉크를 빨아들이는 독특한 스노클이라는 모델이 있었지만, 아이젠하워 원수가 독일 항복문서에 사용하여 유명해진 파커51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절치부심 스노클보다 덩치를 더 키우고, 독특한 잉크 충전 방식을 그대로 적용, 새롭게 디자인하여 내놓은 것이 PFM이었던 것이다. 겉으론 여성용, 남성용의 마케팅 자세를 취하면서 속으론 파커51을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전략은 실패했다. 한쪽 날개인 여성용 만년필 레이디 셰퍼의 실패로 꺾였고 다른 쪽 날개인 PFM 또한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1968년 단종되기 때문이다. 만년필 자체로 본다면 PFM은 매력적이다. 몸통이 굵어 손안에서 편하고, 크고 시원스레 보이는 마름모꼴 상감 펜촉은 멋지다. 하지만 명작(名作)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감이 있다. 잉크 충전 방식이 독특하기는 했지만, 잉크의 저장량도 적었고 복잡한 관계로 자주 망가졌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시대정신의 부재(不在)였다. 왜냐면 만년필은 1910년대 이후 계속 작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부터 이어지는 패자(覇者)들을 보면 워터맨 58-셰퍼 라이프 타임과 파커 듀오폴드-파커 버큐메틱 맥시마-파커51까지 계속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이 작아지는 추세에 1940년대 중반 등장, 삽시간에 필기구 세계를 점령한 볼펜도 한몫을 했다. 펜촉이 없고 뚜껑이 없어 작고 가는 볼펜과 PFM의 큰 덩치는 세트를 이루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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