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식의 시사 인문학] 전시적(展示的)인, 너무나 전시적인

입력 2018-11-08 06:00 수정 2018-11-1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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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칼럼니스트

정치, 경제와 관련하여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 두 가지에 대해서 짚어보고 싶다. 하나는 정부의 공공부문 일자리 계획안 발표이고 또 하나는 통계청장 교체다. 엄청난 사건도 아니고 그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소한 일로 흘려보내기에는 그 함의나 상징적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아 보인다.

이름도 잘 지은 공공부문 일자리

정부가 10월 24일 경제와 관련한 ‘특단의 대책’을 공식 발표했다. ‘일자리 창출 지원 방안’인데, 이 중에 ‘공공부문 맞춤형 일자리(5만9000개) 계획안’이 들어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맞춤형 일자리들의 명칭이다.

여기에 몇 가지만 적어보면, ‘산(山)과 전통시장 화재 감시원(1500명)’, ‘국립대학 에너지 절약 도우미(1000명)’, ‘산업재해보험 가입 확대 홍보요원(600명)’, ‘제로(0)페이 홍보원(960명)’ 등이다. ‘국립대학 에너지 절약 도우미’는 국립대학의 빈 강의실에 켜져 있는 전등을 끄는 일을 맡는 인력이다. ‘제로(0)페이 홍보원’은 소상공인들이 카드 수수료 부담을 없애 주는 일을 하는 데 투입되는 인원을 말한다.

이 발표를 보고 우선 든 생각은 ‘일자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국가 경제정책을 마련, 추진하는 전문가들은 온갖 일자리와 이름을 잘도 만들어 내는구나’ 하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보통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명칭이 적지 않다. ‘제로(0)페이 홍보원’ 같은 경우는 마치 첨단 벤처사업 종사자를 떠올릴 정도다.

개인적인 내 습관도 돌아보게 됐다. 나는 강의를 마치고 학생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가면 전등을 끄는 게 습관으로 굳어져 있다. 에너지 비용을 조금이라도 아낀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이 사소한 버릇이 취직 문제로 노심초사하는 어느 젊은이의 일자리를 막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의 일자리 계획안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매우 과감해 보인다는 데 있다. 아무리 단기, 임시직, ‘알바’라지만 당장 일자리 5만9000개를 정부가 만들어 내겠다는 계획 아닌가. 비용 부담을 걱정하면 국가 재정, 즉 국민 세금을 투입하겠다는 정답이 준비돼 있을 것이다. 취직하려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고 동분서주하는 미취업 청년들의 처지에서 보면 큰 기대를 가져볼 만하다.

그 대책은 결국 교언영색 아닌가

이 일자리 계획안 발표를 보고 이보다 더 크게 갖게 된 의문점이 있다. 계획안의 당초 목적이 취업 통계숫자를 올리기 위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발표한 경제부총리는 “통계적 목적은 전혀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일자리 계획안이 한갓 미봉책에 그치지 않으려면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점과 해법을 지적, 제시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양질의 일자리 확보는 물론이고 장기적인 국가 경제를 논하면서 현재의 막강한 귀족노조를 개혁하는 과제나 민간 기업의 고용 유연성을 확보하는 과제를 제쳐 둔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원색적 표현을 빌리면 ‘입 달린’ 경제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사항이 아닌가 말이다.

결국 정부의 ‘공공부문 맞춤형 일자리 계획안’은 암담한 지경으로 계속 추락하는 취업통계 숫자를 단 한 치라도 끌어올리려는 조바심에서 나온 ‘언 발에 오줌 누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정부가 일자리 마련을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고 정책효과도 없지 않음을 국민에게 내보이려는 전시적(展示的)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다. 근본적 접근이 아니라 피상적 대응이고 보여주는 데만 신경 썼다는 말이다.

정부의 이런 일자리 계획안을 보자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 말은 ‘논어(論語)’의 학이편(學而篇)에 나온다. 공자는 “교묘한 말과 그럴싸한 좋은 표정을 짓는 사람 중에는 어진 사람이 적다[巧言令色 鮮矣仁]”고 말했다. 달콤한 말과 행동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것을 극히 경계한 것이다.

정부가 고심 끝에 내놓은 ‘특단의 대책’에 대해 ‘교언영색’이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비판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상식 수준에서도 쉽게 파악되는 문제점이나 부작용을 제쳐놓고 이름만 요란한 근시안적 미봉책을 ‘특단의 대책’이라고 포장, 발표하는 일은 공자가 비판한 ‘교언영색’과 다름없다고 본다.

통계청장 전격 교체가 알려준 것

청와대는 8월 말에 통계청장을 포함한 6명의 차관급 인사를 단행했다. 통계청장의 교체가 의아하다는 시선을 의식해 청와대 대변인은 차관인사 발표 당시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보통 1년 2~3개월 정도가 차관의 평균 재임 기간”이라고 설명했다. 통계청장 인사와 관련해서는 “표본 오류 논란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이런 발표를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면 통계청장 교체는 극히 자연스럽다. 굳이 흠을 잡더라도, 현 정부 역시 역대 다른 정부와 마찬가지로 차관의 재임 기간이 너무 짧은 게 아니냐고 가볍게 꼬집힐 정도다.

그런데 이 인사는 단순한 ‘교체’가 아니라 경질의 성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장의 교체 시기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7월 고용지표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을 나타낸 데다 8월 하순 통계청이 내놓은 가계동향조사의 소득 분배 역시 크게 악화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통계청장이 나쁜 통계 때문에 잘렸다고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청와대로서는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고 이 사실을 통계가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당에 담당 청장이 고약한 통계를 그것도 여러 차례 내놨으니 매우 비협조적(?)이라고 보고 잘라 버린 게 아닌가 짐작되는 것이다. 청장이 미리 알아서 기지는 못할망정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찍힌 거라는 의심이다. 필자의 눈에도 이 일이 ‘오비이락(烏飛梨落)’으로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전시적 측면에만 신경 쓰다가 나오게 된 패착(敗着)에 가까워 보인다.

지금도 유효한 기자(箕子)의 탄식

기자(箕子)는 까마득한 옛 중국 상(商)나라 사람이다. 배포가 크고 성품이 강직했던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어느 날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의아하게 여긴 주변 사람이 물었다. 기자는 자신이 섬기는 주왕(紂王)이 앞으로는 상아 젓가락을 쓰려고 하니 만들라고 지시했는데 그게 큰 근심거리라고 대답했다. 상아 젓가락을 만드는 그까짓 일에 웬 걱정이냐고 핀잔하듯이 그 까닭을 물었다. 기자가 대답했다. “상아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게 되면 여태까지 써오던 질그릇이 성에 차지 않을 게 아니오? 그러면 옥그릇을 만들라고 하게 될 테고, 옥그릇을 사용하면 예전의 요리가 성에 차지 않아 진귀한 음식을 만들라고 하지 않겠소? 그다음에는 복장을 화려하게 바꾸게 될 거고 궁궐 또한 호사스럽게 만들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상아 젓가락 만드는 일이 어찌 하찮은 일이겠습니까?” ‘사소한 것에서 장차 드러날 일을 안다’는 뜻의 고사성어 ‘견미지저(見微知著)’는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통계청장 교체에서 ‘견미지저’를 떠올린 건 과민한 탓일까? 어쨌든 어떠한 문제에 부닥쳤을 때 직시(直視)하여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겉으로 보이는 면에나 신경을 쓰는 모습은 한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안이한 전시적 행태의 전형이다.

요즘 경제 관련 화제는 단연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정책실장의 교체 문제다. 이들의 필수적 요소는 경제 정책의 수립, 시행에 전시적 대응이 아니라 문제를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적극 해결하려는 능동적 자세이다. 흔들리는 국가 경제를 안정화할 수 있는, 풍부한 경륜(經綸)과 탁월한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동안 정부 요직의 인사에 대하여 ‘내로남불’이니 ‘보은 인사’니 하는 냉소와 부정적 평가가 적지 않았다. 상식 수준의 기대조차 충족하지 못한 인선도 있었다. 이번 두 요직에 대한 인사만큼은 이런 비판과 우려를 날려 버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육중한 진리로 실감되는 요즘이기에 이런 소망은 더욱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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