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사에라’]꽃보다 사람이

입력 2018-02-2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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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스튜디오/2014.08.07/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기호 /스튜디오/2014.08.07/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혹한기 훈련이 따로 없구나. 롱 패딩에 달린 모자를 쓰고, 주머니 속 핫팩을 연신 주물러 봐도 옆구리를 베고 지나가는 한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예리해져 갔다. 승혁은 휴대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새벽 네 시 사십오 분이 막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다섯 시간만 더 버티면 된다.

승혁은 문득 컵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따뜻한 국물이라도 들이킨다면 좀 나을 것도 같은데… 한데도 승혁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러다가 누군가에게 자리를 빼앗긴다면? 교문 앞 노른자위 이 자리를 빼앗긴다면?

승혁은 저도 모르게 핫팩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핫둘, 핫둘, 군에서 지겹게 했던 PT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교문 위에 내걸린 ‘축 졸업’ 플래카드에선 음산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도매시장에서 3만 원어치 떼어오면 그걸로 꽃다발 3개를 만들 수 있거든. 꽃다발 하나를 3만 원에 팔면, 보자… 2만 원이 남는 거잖아. 혜숙은 계산기를 연신 두들기면서 말했다. 하루에 꽃다발 30개만 팔면 60만 원 버는 거네.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계산기 숫자처럼 명쾌하게 떨어진다더냐. 승혁은 토를 달고 싶었으나 말을 아꼈다. 토를 달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승혁과 혜숙은 부모의 동의 없이 동거하는 처지였다. 둘 다 아르바이트로 공평하게 생활비를 분담했는데, 지난달 승혁이 편의점 점주와 말다툼을 하고 일을 그만둔 뒤로는 당장 펑크가 나고 말았다. 통신사 콜센터에서 일하는 혜숙이 원룸 월세는 혼자 해결했지만, 해결되지 못한 생활비가 한겨울 마당에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 쌓여나갔다.

승혁도 마냥 손을 놓은 채 지낸 것은 아니었다. 다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방학이었으니까, 다른 아르바이트 경쟁자들도 많았고, 어찌 된 게 전에 없이 50·60대 머리가 희끗희끗한 경쟁자들도 갈수록 늘어만 갔다. 그러니 어쩌나. 승혁은 계속 원룸에 앉아 내리는 눈만 바라보았을 뿐. 그러다가 혜숙의 입에서 나온 것이 졸업식 꽃 판매 아르바이트였다.

첫날, 승혁은 박스 3개에 혜숙이 밤새 만들어준 꽃다발 30개를 담아 원룸 인근에 있는 유치원 졸업식에 갔다. 유치원이니까, 모두 천진난만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막 꽃 같은 마음으로 꽃다발을 사주지 않을까, 승혁은 예상했다. 하지만 그런 승혁의 예상은 첫날부터 보기 좋게 어긋났는데, 그날 승혁은 단 2개의 꽃다발만 팔았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부모들은, 꽃다발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꽃 한 송이를 가운데 놓고 막대풍선이나 팽이, 초콜릿으로 장식한, 꽃다발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이상한 다발들만 줄기차게 팔려나갔을 뿐이었다. “에이, 아이들이 꽃인데, 거기에 꽃이 뭐가 더 필요해요.” 어떤 학부모는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곤 지나쳤다. 매서운 아침 바람을 맞은 승혁의 꽃다발들은 모조리 시들어버리고 말았다.

유치원이니까 그랬을 거야. 중학생들을 꽃이라고 부르기엔 좀 민망할 테니까, 여드름 때문에 피부가 엉망인 애들이 많을 테니까, 그걸 꽃으로 가려야 할 테니까, 자리만 좋으면… 승혁은 다시 PT체조를 하면서 추위를 쫓았다. 희부여니 사위가 밝아오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교문 입구에 멈춘 승합차에서 조립식 테이블을 내리던 한 남자가 승혁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 그러니까 저는… 꽃을 좀 팔려구요.”

승혁의 말에 남자가 살짝 헛웃음을 지었다.

“밤새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거예요?”

남자의 말에 승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저씨 초짜죠? 이런 일 처음 하죠?”

남자는 승혁 바로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테이블을 펼쳤다.

“뒤 좀 한번 봐봐요.”

남자가 턱으로 승혁의 뒤 가로수를 가리켰다.

승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로수를 바라보았다. 어두웠을 땐 보이지 않던 가로수 밑동에는 굵은 쇠사슬이 묶여 있었고, 자물쇠가 채워 있었다. 자물쇠에는 ‘승리화원 꽃’이라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돌아보니 가로수마다,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 작은 빈틈마다 쇠사슬과 자물쇠, 명패가 붙어 있었다.

“여기 다 이삼 일 전부터 자리 맡아놓은 거예요. 여기서 이러면 싸움 나요.”

승혁은 그 자물쇠를 보니, 어쩐지 다리 힘이 쭉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맹렬하게, 컵라면을 먹고 싶다는 허기가 밀려 들어왔다.

“에구, 오늘도 어째 사람보다 꽃다발이 더 많겠구나.”

남자가 한숨처럼 혼잣말을 했다. 바야흐로 졸업시즌이었다. (월 1회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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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199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공모에 당선.

소설집 ‘최순덕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김 박사는 누구인가’.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 ‘차남들의 세계사’ 등.

이효석문학상, 김승옥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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