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벌거벗은 듯 불편한 시대

입력 2017-03-2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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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시간이 나면 대형서점에 들른다. 책 한 권 읽으면서 마른 정서에 물 한 방울 적셔줄 요량이기도 하지만, 어떤 책들이 잘 나가는지 궁금하기도 해서다. 베스트셀러 코너를 비롯해 수많은 책 중에서 나의 시선을, 독자들의 선택을 받는 시작점은 무엇일까? 단연 책의 제목이 먼저일 테고 그에 맞는 표지 디자인과의 조합이 두 번째다. 아주 가끔은 제목에 맞는 캘리그라피도 한몫한다.

이처럼 광고라는 측면에서 보면 비주얼과 카피라이팅은 인식의 사다리에 우선할 수 있는 첫 관문이기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책의 ‘본질’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어떨까? 일반적인 소모품처럼 광고의 속성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조금은 미안하지 않은가? 적어도 책을 비롯해 무용이나 뮤지컬, 연극, 오페라 등 예술에 대한 광고에서 만큼은 부(部)가 주(主)를 넘어서면 안 될 것 같은 소박한 고집마저 들기도 한다.

예전에 같이 일했던 한 선배 PD와의 일화가 생각난다. 라디오 드라마를 연출 중이던 그 선배는 10여 분 되는 드라마 내내 배경음악(back music)이나 효과음(sound effect)를 쓰지 않는 것에 도전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 선배의 발상은 황당하다. 성우와 아나운서들은 왜 자기가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실험의 노예가 돼야 하는지 불만이 가득했다. 나 또한 선배의 실험정신에는 공감하지만, 결국 어떤 반응이 나올지 뻔히 보이는 실험에는 못마땅했다. 보다 못해 “선배님, 아무리 그래도 드라마에 배경음악 하나 없이 대사만으로 연출한다는 것은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아요?”라고 조심스레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선배는 “본질을 판단하는 데에 그 어떤 헛갈리는 요소도 다 배제하고 싶어. 극(劇)을 하는 우리의 역할은 좋고 나쁨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역할이면 족해. 극(劇)은 길잡이일 필요도 없고, 길잡이가 되는 연극을 원하지도 않아. 스스로 현상(現像)을 느끼고 감동이든 불만이든 스스로 찾아내려는 노력. 그 과정이 불편할지언정 ‘불편한 과정’에서 제대로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내야 사람이든 사회든 조금씩이라도 성장할 수 있음을 주변 요소 없이 올곧게 느끼게 해주고 싶어. 그것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야”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시 서점으로 돌아와 보자. 당신의 손에는 ‘불편한’ 책이 있는가, ‘눈에 띄는’ 책이 있는가? 그럴싸한 표지의 책을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며 무성의한 표지의 그것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다. 표지의 호감도가 책의 최종 구매단계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쳐야 할지’ 그 선을 말하고자 함이다. 문학의 여러 존재 이유 중 하나가 ‘스스로 생각하게 함’이라면, 읽는 동안 느껴졌을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의 이유 모를 불편함에서 책의 존재 이유,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삶의 의미를 찾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국이 많이 어수선하다. 맞지 않는 옷은 내쳐졌지만 새 옷도 맘에 들지 안 들지는 모를 일이다. 어떤 옷도 입지 못하고 벌거벗고 있지만, 그 누구도 수치심 같은 것은 없는 듯하다. 대권 주자들이 그렇고 그들을 마치 날개 달린 새 옷인 것처럼 요목조목 따지고 설명해대는 언론들도 얄궂기는 마찬가지다. 불편함을 경험하고도 홀가분하지 않다면 그것은 본디 아직은 참의미를 다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제 겨우 한 산을 넘었을 뿐이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장인의 손끝에 얼마나 많은 고뇌의 시간이 있었는지 그 역사를 되짚어봐야 할 때다. 이 시대가 나는 아직도 벌거벗은 것처럼 영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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