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세상] ‘철’자는 아무 죄가 없다

입력 2017-02-23 08:05 수정 2017-02-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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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주필

오래전에 이런 만화를 본 적이 있다. 종철이 막철이, 두 초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가 어느 날 학교로 도시락을 들고 찾아간다. 아이들이 도시락을 잊고 등교했다는 설정이니 학교 급식을 먹는 요즘 이야기는 아니다.

하여간 엄마는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종철아아!” 하고 불렀다. 그랬더니 수위가 수업이 끝난 줄 알고 종을 쳤다. 다들 ‘아니 벌써?’ 그러고 있는데 이번엔 엄마가 “막철아아!” 하고 둘째를 불렀다. 수위는 더 세게 종을 막 쳤다. ‘철’자 때문에 생긴 일이다.

‘철’은 좋은 글자다. 옛날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남자아이 이름이 철수 아니었나? 이름에 쓰는 철의 한자는 哲 喆 아니면 鐵 澈 徹 轍, 이런 정도다. 나는 喆인데 제일 많이 쓰는 건 哲인 것 같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도 哲+秀다.

2011년 10월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안철수 씨와 박원순 씨가 후보 단일화를 할 때 나는 “사람 이름엔 ‘철’이나 ‘순’이 들어가야 좋다. 두 글자 다 있으면 더 좋지.” 이렇게 농담을 하곤 했다. 어렸을 때 여자 이름이라고 하도 놀림을 당해서 그런 억지를 더 부렸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이놈의 ‘철’ 자가 너무도 많이 횡행하는 것 같다. 대선 여론조사를 할 때마다 1위로 나오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에게는 ‘3철’이라는 비선 실세가 있다고 한다. 전해철 양정철 이호철 3인인데,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작품인지 실제 배후 영향력이 그렇게 큰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두고 볼 일이다.

이런 건 그래도 괜찮다. 북한과 관련된 ‘철’이 문제다.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된 김정남의 여권상 이름은 김 철이다. 한자는 모르겠지만, 연변의 유명 재중동포 계관시인 김 철과 이름이 똑같다. 말레이시아 당국을 비난하며 숨진 북한여권 소지자 김 철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떠드는 쿠알라룸푸르 주재 북한 대사의 이름은 강철이다. 김정남 암살 공범 중 하나로 붙잡힌 사람은 리정철이다. 젠장, 또 또 철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 북한의 통일전선부장은 김영철(金英徹)이다. 북한군 서열 2위라는 인민무력부장 자리는 현영철, 김일철(재임 1998~2009) 이런 사람들이 차지했었다. 현영철은 2015년 5월 총살됐는데 당연히 이름 때문에 그리 된 건 아니다.

1997년 2월 분당의 집 앞에서 암살된 이한영은 북한 공작원 김영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김정일의 처조카인 그는 한국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뜻에서 李韓永이라고 이름을 바꿨다는데, 결국 북한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번의 김정남 암살도 김정은의 지시에 의해 자행된 일로 보인다. 김정은의 형은 김정철. 김정일의 차남이다. 한자 이름은 正哲이라고 한다.

‘철’은 더 있다. 2000년대 초반 당시 주 유엔 북한대사는 이형철(李亨哲)이었다. 1972년 극비리에 서울을 다녀간 북한의 밀사는 부수상 박성철(朴成哲)이었다. 불가리아 대사, 국가 부주석, 정무원 총리를 역임한 거물이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리우올림픽에 출전한 북한 유도팀의 감독은 박정철이었고, 지금 북한 외무성의 미국연구소 실장 이름은 김인철이다. 지난해 7월 러시아에서 제3국으로 망명한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의 이름은 김성철이다. 2006년에 탈북해서 3년 후 서울대에 합격한 인민군 청년도 김성철이었다.

1994년 6월 러시아에서는 최천수와 김인철이라는 북한인 2명이 8kg의 헤로인을 밀매하다 체포된 일이 있다. 참 많기도 하다. 내가 다 주워섬기지 못해서 그렇지 ‘북한의 철’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북한에 ‘철’자 이름이 많기 때문인지 남한에서는 1999년에 ‘간첩 리철진’이라는 영화까지 만든 적이 있다. 개그맨 김영철은 북한 출신이 많이 나오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다른 출연자들의 말에 일일이 토를 달다가 “북한이라면 총살감 1위”라는 말을 들었다. 함부로 농담을 하고 왼새끼를 꼬거나 건성박수를 치거나 최고 존엄 앞에서 졸면 목숨이 달아나는 게 북한 사회다.

그러나 저러나 뭐가 어찌 됐든 ‘철’자는 아무 죄가 없다. 철순이라는 이름을 쓰는 나도 아무 죄가 없다. 1987년 고문치사당한 서울대생 박종철은 朴鍾哲이라고 쓴다. 민주화운동가로 기억되는 이름이다. 그러니 부디 이 글자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부정적 인상을 버려주시기를! ‘개구장이 철이’(KBS TV 어린이드라마, 1979) 이런 귀여운 캐릭터나 잘 기억해주시기를! fused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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