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를 달려온 한국자동차]비운의 명차 '칼리스타', 2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입력 2012-02-03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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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진도그룹 회장 英 '팬더' 인수…칼리스타 출시

▲1992년 쌍용차를 통해 한국 시장에 모습으르 드러낸 칼리스타는 '한국 최초의 정통 스포츠카'라는 이름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2년 뒤 판매 부진의 멍에를 쓰고 쓸쓸히 사라졌다.
지붕이 없는 자동차를 일컫는 말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미국식 용어인 ‘로드스터’나 유럽식 용어인 ‘카브리올레’, ‘바르게타’가 가장 대표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정통 로드스터가 등장한 것은 언제 어떤 차였을까? 정답은 1990년대 초 등장한 쌍용차 칼리스타다.

칼리스타는 영국에서 개발됐던 차였다. 그러다 우리 기업인의 노력으로 한국에서 생산된 적이 있는 차다. 아쉽게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많은 이들의 추억 속에 남아있는 명차다.

◇‘車마니아’ 김영철의 당찬 도전=‘진도모피’를 생산했던 진도그룹은 칼리스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룹 오너 김영철 회장의 자동차 사랑 때문이다.

김 회장은 청년 시절부터 자타 공인 자동차 마니아였다. 자동차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여건이 생길 때마다 세계 각국의 명차를 탐구하느라 바빴다.

1981년, 맏형 김영원 회장과 함께 진도산업의 경영을 맡던 마흔 두 살 청년 경영인 김영철은 사업차 영국 런던을 방문한다. 평소 차에 대한 애착이 많았던 그였기에 길가를 오가면서도 자동차를 탐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한 스포츠카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팬더’라는 업체가 만든 스포츠카 ‘리마’였다. 팬더는 가내수공업 형식으로 차를 만들던 영국의 작은 기업이었다. 가내수공업 식으로 차를 만들었기 때문에 범퍼 모습이 제각각이었다는 점이 팬더 차의 특징이었다.

이후 김 회장은 팬더에 대해 수소문하다 팬더가 파산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팬더를 헐값에 인수했다. 그의 팬더 인수 이유는 단 하나. ‘리마’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자동차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회장은 팬더 인수 후 ‘리마’의 후속 버전 ‘칼리스타’를 출시한다. 칼리스타는 그리스어로 ‘작고 아름답다’는 뜻의 말이다. 칼리스타는 영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승승장구했다.

김 회장은 칼리스타 생산 원가를 35% 줄여 8700달러에 판매했다. 세계 곳곳에서 저렴한 부품을 사와 조립한 덕분이었다. 팬더는 1983년 한 해에만 135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양산이 불가능한 수제 자동차인 데다 조립 기술이 조악해 추가 기술 발전이 불가능했다. 결국 김 회장은 팬더의 지분 매각을 고려했다. 그때 팬더를 인수하겠다고 당차게 나선 곳이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공격적으로 사세를 넓히던 쌍용그룹이었다.

▲1980년대 초 김영철 진도 회장의 눈길을 끌게 했던 팬더의 클래식 로드스터 '리마'의 스케치.
◇최초의 정통 스포츠카 등장=자동차 사업에 큰 욕심을 품었던 쌍용그룹은 1986년 말 하동환자동차공업의 후신 동아자동차를 인수하고 쌍용자동차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동아차 인수 이듬해인 1987년 쌍용차는 김영철 회장의 팬더를 눈여겨보게 된다. 당시 라이벌인 현대차와 대우차는 각각 프레스토, 르망, 에스페로 등 세단 승용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쌍용그룹은 용어조차 생소했던 스포츠카 로드스터를 한국에 도입해 부유층 등의 새로운 소비 시장 공략에 나서겠다는 전망을 내놨다.

1987년 6월 팬더 지분의 80%를 인수한 쌍용차는 이듬해 3월 팬더의 경영권을 통째로 가져왔다. 팬더의 자동차 뼈대를 한국의 평택공장으로 들여 와 국산 부품과 국산 조립 기술을 통해 칼리스타를 만들어보겠다는 야심찬 결의였다.

1992년 쌍용차는 평택공장에서 우리 기술과 부품으로 칼리스타를 재탄생시켰다. 쌍용의 칼리스타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에 6기통 2.9리터 엔진과 4기통 2.0리터 엔진을 얹었다. 주력 모델인 2.9리터 모델은 최고출력 145마력의 힘으로 최고시속 210㎞까지 낼 수 있었다.

쌍용차는 칼리스타를 ‘국내 최초의 정통 스포츠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놨다. 반듯한 세단만 보던 소비자들에게 칼리스타는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칼리스타는 1992년 6월 싱가포르 등 동남아권 국가와 연간 100~200대 규모의 수출 계약을 맺었다. 유럽과 중동에서도 수출 문의가 잇달을 정도로 인기 전망이 밝았다.

◇김석원은 칼리스타를 싫어했다=야심찬 출시 2년 뒤인 1994년, 쌍용차는 돌연 칼리스타의 생산을 접게 된다. 판매 부진 탓이었다.

당시 쌍용이 책정한 칼리스타의 내수 시장 가격은 3000만원대.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현대차 그랜저 V6 2500 모델이 2580만원임을 감안하면 매우 비쌌다. 때문에 연간 내수 판매량이 50대도 채 되지 않았다. 또한 로드스터와 스포츠카에 대한 당시 소비자들의 인식 부족도 칼리스타의 요절에 한몫을 했다.

칼리스타가 생각보다 일찍 시장에서 사라진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 쌍용그룹을 이끌었던 김석원 회장의 취향과 맞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해병대 223기 청룡부대 수색대 출신인 김 회장은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코란도 훼미리와 무쏘 등 정통 SUV를 사랑했다. 특히 그는 검은색 구형 코란도를 즐겨탔다. 그런 그에게 여성스러운 이미지와 곡선미가 느껴지는 칼리스타는 어울리지 않았다.

본인의 취향과 맞지 않는 데다 잘 팔리지도 않는 차를 굳이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김 회장은 단호하게 칼리스타의 생산을 포기했다.

결국 칼리스타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비운의 명차로 남았다. 그러나 많은 자동차 관계자들은 “만약 20여년이 지난 지금쯤 칼리스타가 태어났다면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간혹 꺼내며 추억 속의 명차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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