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27. ‘볼펜의 아버지’ 라슬로 비로

입력 2018-10-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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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연구소장

아르헨티나 하면 축구를 잘하는 나라, 극심한 인플레가 떠오른다. 하지만 1940년대로 시계를 돌리면 아르헨티나는 잘사는 나라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르헨티나로 돈을 벌려고, 좀 더 잘살기 위해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서 이민을 왔다.

라슬로 비로(1899~1985) 역시 아르헨티나 이민자 중 하나였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비로는 다른 사람들과 사정이 좀 달랐다. 당시 헝가리가 나치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에 유태계 신문기자였던 그는 프랑스 등을 전전하다 아르헨티나까지 가게 됐다. 아버지는 의사였다. 그는 자동차 관련 특허가 있는 발명가, 신문사에서 기사를 쓰는 기자였다. 그러니 나치의 탄압이 없었다면 헝가리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로는 기사를 쓰면서 만년필에 불만을 갖게 됐다. 툭하면 잉크가 새고 글씨가 늦게 말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걸 개선하고 싶어 궁리하던 중 어느 날 어린아이들이 길에서 구슬치기하는 것을 보았는데, 물웅덩이를 지난 구슬이 땅에 젖은 자국을 남기는 걸 보고 볼펜을 만들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펜촉 대신 구슬로 잉크를 흘려 글을 쓸 수 있는 필기구는 1899년생인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특허(1888년 존 라우드의 특허)로 등록되고 만들어진 적도 있다. 발명가였던 그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 라슬로 비로의 1978년 모습.
▲ 라슬로 비로의 1978년 모습.
그런데 왜 비로가 볼펜의 아버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가 만든 볼펜 이전의 것들은 하나같이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년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워터맨이 실용적 만년필을 만드는 데 모세관 현상을 이용한 것처럼 비로 역시 볼펜의 실용성을 모세관 현상에서 찾아냈다.

비로의 모세관 현상을 이용한 볼펜을 가장 위협했던 사람은 미국인 사업가 밀턴 레이놀스였다. 그는 사업가답게 비로의 볼펜이 굉장한 사업성이 있다고 확신해 미국에 가져다 팔고 싶어 했다. 하지만 북미 판매권은 이미 다른 회사가 갖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을 바꾸어 비로의 특허에 저촉되지 않는 볼펜을 만들기로 했다. 1945년 이렇게 급하게 서둘러 만든 볼펜은 미국의 한 백화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끝없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살 만큼 대히트를 했지만 품질은 엉망이었다.

레이놀스의 볼펜은 비로의 특허에 저촉되지 않으려고 중력만으로 잉크를 내려 보내려 했기 때문에 펜 끝을 늘 아래로 향해야만 글씨를 쓸 수 있었고, 이따금 몸통을 열어 공기를 넣어 주어야 해 번거로웠다. 이런 사정을 소비자들은 처음부터 알 턱이 없었다. 12.5달러라면 고급 만년필 가격이었지만, 처음 나온 데다 만년필의 불만사항을 개선한 것은 물론 추운 북극에서도 사용할 수 있고 몇 년 동안 잉크를 넣지 않아도 된다는 광고는 꽤 효과가 있었다. 새로운 필기구 볼펜이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레이놀스의 대성공으로 제2, 제3의 레이놀스가 나타났고 삽시간에 100여 개 볼펜이 시장에 난립했다. 쓸 만한 게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 엉터리였다. 가격이 떨어지고 사람들의 신뢰 역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1945년부터 1954년까지 약 10년간 엎치락뒤치락하는 볼펜과 만년필의 매출은 이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볼펜이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만년필의 매출을 앞질렀지만, 다시 1949년부터 1953년까지는 만년필에 역전되고, 1954년이 돼서야 볼펜이 다시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아무렇게나 갖고 다녀도 잘 써지는 비로의 방식이 맞았으며 볼펜은 싸고 편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세워지고, 자리 잡는 데 약 1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발명의 날은 9월 29일. 이날은 라슬로 비로의 생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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